나를 위한 '셀프 포상'엔 레몬 맛 나는 이 맥주를

한은형 소설가 2022. 7.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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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라들러

오가와 이토라는 작가가 베를린에 살던 시절, 어학원에 가기 싫은 본인을 달래기 위해 셀프 포상법을 고안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큭’ 하고 웃었다. 월요일은 케이크의 날, 화요일은 욕조의 날, 수요일은 요가의 날, 목요일은 마사지의 날, 또 금요일은 생선의 날이었다고. ‘맥주의 날은 왜 없는 거지?’ 하고 의아해하다 바로 깨달았다. 베를린에서 맥주는 일상이고, 매일 마시는 것이니, 포상이 되기에는 너무 흔하다고.

나도 베를린에 산 적이 있다. 3개월 살았을 뿐인데 ‘살았다’라는 감각은 여전하다. 매일 장을 보고, 어딘가로 출근이라는 걸 하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했다. 작은 마당이 있는 복층 집에 혼자 살았다. 집이라고는 하지만 방은 없었다. 뼈대만 있는 집이었다. 1층은 거실과 부엌, 2층은 침실과 욕실이 있는 스튜디오에 가까웠다. 아직 집세가 폭등하기 전의 베를린이었다. 자기네는 ‘스쾃’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한국의 경리단길이나 연남동 같은 젠트리피케이션은 자기네 일이 아니라고 말하던 베를리너의 자부심 넘치던 목소리도 생각이 난다.

레몬 맛이 나는 상큼한 맥주, 라들러. /플리커

내가 그 집에서 가장 좋아하던 장소는 작은 마당이었다. 마당에 있는 덱체어에 앉아 책을 보거나 도시락을 먹었다. 마당에서 채 50m가 안 되는 부엌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마당으로 소풍 온 느낌을 내면서 말이다. 이런 번거로운 일을 했던 것은 사람들이 야외에서 식사를 즐기는 소리에 둘러싸이곤 했기 때문이다. 마당에서 혼자 있을 때 말이다. 그래서 그 시간이 되면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냉장고에서 꺼내왔다. 그리고 얼굴도 모르고, 어디선가 만난다고 해도 알 수 없을 그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이때, 인생의 양면에 대해 느꼈다. 나는 지금 외로운 동시에 외롭지 않다고. 쓸쓸하면서도 따뜻하다고.

프로스트. 거기서는 건배할 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건배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밥만 먹을 수 있나? 나는 그럴 수 없다. 그래서 맥주를 마셨다. 백 퍼센트 확률의 맥주였다. 내 옆에는 도시락과 함께 냉장고에서 꺼내 온 맥주가 있었다. 나는 얼굴을 모르는 내 이웃들도 맥주를 마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베를린에도 와인을 마시는 사람도 있고, 나도 와인을 마신 적이 있지만, 뭔가 어정쩡했다. 베를린에서의 와인이란 그리 마시고 싶은 술이 아니었다. 동네의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베를린은 맥주의 분위기였다. 맥주 친화 도시라고 해야 할까? 감자와 소시지와 슈니첼 같은 음식들을 먹으면서 와인을 찾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메뉴판도 그랬다. 와인에 비해 맥주의 종류가 훨씬 많았다. 라거, 바이젠, 휘트 비어, 세종, 슈바르츠 비어, 이렇게 분류해놓은 곳도 있고 바이에른, 쾰른, 함부르크, 브란덴부르크 같은 식으로 지역별로 나누어놓은 곳도 있었고, 그냥 맥주의 이름들을 나열해놓은 곳도 있었다. 문제는 이 고유명사들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맥주가 많았다는 거다.

이게 다가 아니다. ‘유기농 맥주’와 ‘무알코올 맥주’ 그리고 ‘라들러’라는 카테고리가 있었다. 여기가 나의 주 종목이었다. 베를린에서 나는 무알코올 맥주나 라들러의 애호가였다. 라들러의 알코올 도수는 2.5도 정도. 무알콜 맥주보다는 높고, 일반 맥주보다는 낮다. 매일같이 일반 맥주를 마시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무알코올 맥주는 좀 밋밋했다. 그러니 라들러를 마실 수밖에.

독일의 한 매장에 진열된 라들러. /위키피디아

라들러(radler)가 뭔지 아나? 자전거다. 독일어 사전에 보면 다른 뜻도 있다. ‘주류’. 바로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바로 이 주류가 라들러다. 이쯤하면 짐작하셨겠지만, 자전거를 탈 때 마시는 맥주가 라들러다. 라들러가 들어 있는 병이나 캔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그려져 있는 경우도 많다. 나는 수많은 라들러 종류를 보면서 생각했다. 자전거를 타는 데 알코올 2.5도 정도는 괜찮다며, 공식적으로 권장되는 느낌이라고. 나는 자전거를 타나? 전혀. 여의도 광장처럼 넓디넓은 데라면 시도해볼 수 있겠지만 길에서 타지 못한다. 어떻게 굴릴 수야 있겠지만 멈추거나 방향을 조절하거나, 급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대처할 어떤 자신감도 없기에 타지 않는다. 그런 내가 라들러라니. 자전거를 타지 않아도 라들러를 마실 수는 있는 것이다. 자전거 면허가 있는 사람에게만 라들러를 파는 것은 아니니까.

베를린의 자전거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나는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출근했는데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경외심을 품었다. 대체 어떤 신체 조건과 체력을 가지면 저런 스피드를 낼 수 있나? 자전거 군단들은 버스 앞에서 달리곤 했는데 버스를 방해한 적이 없다. 버스보다 빨랐으면 빨랐지 걸리적거린다거나 하는 느낌이 없었다. 자전거 경주라도 하듯이 와르르 쏟아져 나와 거의 도로와 싸우며 스테미너를 불태우고 있었고, 아스팔트를 녹일 듯한 화력이었다. 그들은 아주 맹렬했고, 강력했다. 그런 건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니었다.

그들은 라들러를 마신 걸까? 아침을 먹고 라들러를 한 잔하고 나온 걸까? 2.5도 정도 되는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면 그렇게 불타오르는 건가? 그 미친 화력은 라들러로부터 비롯한 걸까? 이런 것을 궁금해하며 라들러를 마셨다. 나 같은 사람이 라들러를 마시고 자전거를 탄다고 해서 갑자기 미친 라이딩 실력을 갖추게 되는 건 아니겠지만 원래 잘 타는 이들에게 라들러는 엔진오일 같은 건가 싶었고.

아, 라들러가 어떤 맛인지 이야기를 안 했네. 라들러는 레몬 맛이 나는 가벼운 맥주다. 상큼하고, 달다. 그래서 레모네이드처럼 느낄 수도 있다. 레몬만 넣는 건 아니고 자몽을 넣은 라들러도 마셔보았다. 레몬보다는 자몽을 넣은 쪽이 더 내 취향에 가까웠다.

어제 라들러를 만들어 마셨다. 거품이 소복하게 라거를 따른 후 짜놓은 레몬즙을 뿌리고, 꿀을 살포시 얹었다. 한 모금 마시고서 알았다. 이 여름, 내가 만든 라들러를 꽤나 마시겠구나라고. 파는 라들러와 차원이 달랐다. 달지 않고, 시큼함이 살아 있고, 갓 짠 레몬의 향이 폴폴 났으니까. 이 정도면 나를 위한 셀프 포상으로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맥주는 흔하지만 갓 짠 레몬즙으로 만든 라들러는 흔치 않으니까.

이건요, 꼭 드셔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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