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없는 위선"으로 낙태 문제를 해결한 앙겔라 메르켈

김황식 전 국무총리 2022. 7. 23.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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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지난달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금까지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해 온 판례를 뒤집어 사실상 낙태를 금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 사회가 찬반으로 나뉘어 분열이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미합중국이 아니라 미분열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2019년 4월 헌법재판소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며 형법 낙태죄에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결과 낙태를 처벌하지 않는 ‘비범죄화’는 이뤄졌지만, 헌법재판소가 대체 입법 시한으로 제시한 2020년 12월 31일까지 입법이 이루어지지 않아 낙태 관련 사항에 대한 입법 공백 상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회의 책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으나, 그만큼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인 탓이기도 합니다.

일러스트=김영석

흔히 낙태 허용 여부의 근거로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 존중’이나 ‘태아의 생명권 존중’을 들고 있으나, 전자를 대표하는 여성계와 후자를 대표하는 종교계 사이의 다툼이나 양자택일의 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보다 진지한 철학적, 종교적 성찰과 함께 여성의 건강권, 현실적 생존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1990년 서독과 동독 사이에 통일을 위한 협상이 진행될 때 양국의 입장이 크게 달라 ‘통일조약’이 무산될 뻔한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낙태 문제였습니다. 서독 형법 제218조는 특별한 경우 이외의 낙태는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서독 헌법재판소도 낙태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자라고 있는 생명의 생존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판결했습니다. 이에 반해 동독에서는 임신 20주까지 낙태를 자유롭게 허용하였습니다. 양국 간에 쉽게 타협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문제는 통일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하고 넘어갔습니다.

당연히 통일 의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주무 장관은 여성청소년부 앙겔라 메르켈이었습니다. 동독 출신의 개신교도이자 이 문제에 진보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 메르켈은, 보수 가톨릭 신도들을 기반으로 한 자기가 속한 정당인 기독민주당의 반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사회민주당, 자유민주당, 녹색당 등은 낙태를 허용하는 쪽이었습니다. 당시 정치 지형상 진보적 법안은 지지를 얻기 어려웠으나 여론은 오히려 낙태 합법화에 찬성하였습니다. 동독 지역 여성 78%, 서독 지역 여성 58%가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르켈은 자신의 정치적 장래까지 고려하며 타협안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메르켈은 여성들이 낙태에 의지하지 않고도 임신의 부담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는 방법을 모색해야지 낙태 문제에 형법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며, 대신 낙태를 원하는 여성은 먼저 의사와 일정한 상담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해 무분별한 낙태를 막자는 주장을 관철하였습니다. 나아가 헌법재판소에 이 법률안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지 판단을 구하는 심판을 청구하였습니다. 어떤 법의 합헌성에 의심이 드는 경우 법이 효력을 발생하기 전이라도 헌법재판소에 위헌 여부의 판단을 구할 수 있는 제도를 활용한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나중에 합헌 판정을 하였습니다. 동독 출신 여성으로, 헬무트 콜 총리에 의하여 구색 맞추기용으로 기용된 메르켈의 이와 같은 일 처리에 대하여 시사주간지 ‘디 차이트’는 “위선에는 끝이 없다”고 비난하였지만 민감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꾀를 더한 지혜로운 일 처리였고, 통일 독일 사회에의 화려한 데뷔라 할 만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낙태를 범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은 헌재에 의해 이미 결론이 났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생명 존중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그러므로 낙태를 최소화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적 환경을 조성하고, 불가피하게 낙태를 하는 경우 낙태 전후로 적절한 의료서비스와 돌봄을 제공함으로써 균형 있는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낙태 찬반 양쪽의 과도한 대립이나 갈등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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