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 길을 잃다]감축 부담 완화 위한 배출권 거래제, 가격 널뛰기 심해 오히려 기업 옥죄
SPECIAL REPORT
하지만 산업계는 석탄과 같은 화석연료의 에너지 효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어서 3800만t을 줄이기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화석연료를 쓰지 않는 것인데, 이미 최소량만 사용하고 있어 더는 화석연료를 줄이기 어렵다는 얘기다. 조상범 대한석유협회 대외협력실장은 “정유업계만 하더라도 현재 상황에서 온실가스를 줄이려면 공장 가동을 줄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산업계가 그간 2030 NDC 40%와 부문별 감축 비율 조정을 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이유다.
정부는 이 같은 산업계의 환경을 고려해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운영 중이다. 당장 온실가스를 줄이기 어려운 기업에 시간적 여유를 주면서 온실가스를 줄여나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기업마다 감축 목표량이 있고, 목표량만큼 감축하지 못하면 배출권을 구매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과징금을 문다. 반대로 목표량을 초과하면 그만큼 배출권을 내다 팔 수 있다. 하지만 배출권 거래시장이 제역할을 하지 못해 기업의 불만이 쌓이고 있다. 배출권 가격이 급등락을 거듭하면서 온실가스 저감은커녕 기업을 옥죄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배출권 시장의 변동성은 시장 자체가 작고(정부가 정한 기업·할당배출권만 거래 가능), 해외와 달리 현물 거래만이 허용돼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배출권 매매 회전율(허용 배출량 대비 거래량)은 고작 4.3% 수준이다. 선물 거래를 할 수 없으니 기업 입장에서는 헤지(위험회피)를 통해 가격 변동성을 줄이기도 어렵다. 구조적으로 수요가 몰리거나 빠지면 탄소배출권 가격이 급등락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탄소배출권 가격의 급등락은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도움이 안 된다. 특히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기업에는 탄소배출권 가격 변동성이 치명타가 될 수 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낸 금융안정 보고서에 따르면 탄소배출권 가격이 1년간 145% 상승하면 비금속광물 제품 제조업과 전기·가스·증기·공기조절 공급업의 부도율이 각각 1.2%포인트, 1.1%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계에서는 배출권 시장의 유동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근 해외에서 급성장 중인 민간 주도의 ‘자발적 탄소시장’을 활용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자발적 탄소시장은 온실가스를 감축한 모든 기업이 참여해 ‘탄소 크레딧’(감축 물량에 대한 공인 기관 검증 인증서)을 거래할 수 있는 시장이다. 지난해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가 국제탄소시장 지침을 개정해 자발적 탄소시장과 각국의 탄소배출권 시장(규제적 탄소시장) 간 배출권 거래를 연계할 수 있는 제도적 길도 열렸다. 이상엽 한국환경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제조업 비중이 27.8%로 독일(21.6%)이나 일본(20.8%)보다도 높고 미국(11.6%), 영국(9.6%)과는 격차가 크기 때문에 온실가스를 줄이기 더 쉽지 않다”며 “산업 부문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서는 배출권 가격 체제의 정립 등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황정일·신수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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