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남성 53% "키스·애무는 성관계 동의한 것" 성문화 왜곡 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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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성폭력 위험수위
대학원생 곽모씨는 3년 전 대학 동아리방에서 불법촬영 피해를 겪었다. 하지만 불법 카메라가 발견됐음에도 가해자를 잡지 못했고, 학교에서도 공론화하지 않고 유야무야됐다. 대학 재학 중에 이런 사건이 3~4차례 이어졌지만 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곽씨는 “이 사건 때문에 여전히 탈의실이나 공중화장실 이용을 꺼리고, 대학원 진학 시에도 남녀공학이 아닌 여대를 택했다”며 “학교라는 공간이 안전하다고 인식하는데 실제로는 고등학교 때까지 억눌려있던 성적 욕구가 자유분방하게 분출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불법촬영이나 성희롱 위험 때문에 주변 친구들도 “도서관이나 휴게실에서 절대 잠들면 안된다”고 경고한다는 것이 곽씨의 전언이다.
불법촬영 우려, 공중화장실 이용 꺼려
2018년 미투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기성세대보다 개방된 성 문화를 누리고, 성교육도 꾸준히 받아온 젊은 세대에서 성희롱·성폭력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교육부와 국민의힘 정찬민 의원실에 따르면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은 2016년 182건에서 2019년 346건으로 늘었다. 심지어 코로나19로 학교 문을 닫았던 2020년에도 1월부터 7월까지 94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도 교수·교직원보다 학생의 비중이 높다. 2018년 김엘림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가 1994년부터 2018년까지 법적 분쟁으로 이어진 대학 내 성희롱·성폭력 사례를 분석한 결과 270건 중 90%는 가해자가 남성 교수였다. 반면 최근 6년간 발생한 1206건에서는 학생이 가해자인 사례가 62%(748건)에 달했다.
실제로 지난해 8월에는 한국항공대학교에서 4명의 남학생이 6개월간 단톡방에서 여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성희롱 발언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여학생이나 여교수의 이름을 언급하며 “지금 당장 몸캠 찍고 딥페이크(사람의 이미지를 합성하는 것)” “속옷 벗기기 가능” 등의 대화를 나눴다. 피해자는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이유만으로 성적 대상화됐다”며 “평가나 조롱뿐 아니라 구체적인 범죄계획도 포함돼 더 끔찍하다”고 밝혔다. 2019년 청주교대에는 남학생 5명이 단톡방에서 동기 여학생의 사진을 올려 외모를 비하하고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고발 대자보가 붙기도 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성희롱·성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은 20대 남녀의 성인지 감수성 수준에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20대 남성의 성인지 감수성이 다른 세대 남성에 비해 낮았다. 202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성폭력 예방 교육을 수강한 공공기관 종사자 2007명을 대상으로 ‘술에 취해 의식이 없는 사람과 성관계하는 것은 성범죄다’라는 항목의 동의 여부를 물었다. 여성 96.1%, 남성 94.1%가 이 문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20대만 보면 여성의 동의율은 99.1%로 전 연령대 여성 중 가장 높았지만 20대 남성의 동의율은 86.8%로 전 세대 남성 중 가장 낮았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20대가 성교육도 많이 받았지만, 그만큼 왜곡된 성문화도 많이 접한 세대라고 진단했다. 행복한성문화센터 대표인 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는 “인터넷에서 포르노 등 자극적이고 왜곡된 내용을 접해 성적 동의나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며 “이성을 대할 때의 태도나 가치판단에 대한 훈련이 잘 안 되어 있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인하대 성폭행 가해자만 해도 성범죄 전과가 없고, 가정환경도 양호하다”며 “온라인에서 선정적인 콘텐트 등을 접하며 왜곡된 성 관념을 갖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20대가 고등학교 졸업 이후 전문성을 갖춘 강사에게 성교육을 받을 기회는 사실상 전무하다.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연간 15시간 이상 성교육을 의무 이수해야 하지만, 대학에서는 의무이수 과목이 아니다. 성폭력방지법 시행령에 따르면 대학교 소속 교원 및 학생들은 매년 1회 이상, 1시간 이상의 성교육 및 성폭력 예방 교육을 이수해야 하지만 이를 지키지 않아도 별다른 불이익이 없다. 지난해 교육부 대학알리미에 공시된 ‘2020년 대학별 성폭력 예방 교육 실시현황’에 따르면 성폭행 예방 교육을 이수한 학생은 전국 평균 46.1%에 불과하다. 절반가량의 학생들은 형식적으로 마련된 1시간짜리 동영상 교육조차 받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인하대의 경우 이수율이 25.9%로 전국 236개 대학 중 179위에 그쳤다. 서울과학기술대(2.3%), 경희대(4.9%), 동국대(6.3%), 숙명여대(6.4%), 서울시립대(7.6%) 등도 이수율이 낮았다.
전문가들은 성범죄가 발생한 장소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 전반을 점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인지 감수성은 사회의 젠더 문화와 성 역할에 대한 시각에 영향을 받는다. 성인지 감수성 부족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대학 내 CCTV 확대, 교내 출입 통제 등은 근본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런 조치들이 대학 내 성폭행을 예방할 수는 있겠지만, 장소만 바뀔 뿐 성범죄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는 의미다. 배 교수도 “대학은 성범죄 발생 후 후속 조치를 하는 곳이 아니라 성범죄 발생 전 사전교육에 힘써야 하는 곳”이라며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올바른 성 가치관 형성을 위한 교육기관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젊은층 ‘존중과 동의’ 적극적 교육 필요
가장 시급한 것은 시대적 흐름에 맞는 교육이다. 연인 간 성관계에 있어서 존중과 동의가 강조되고, 데이트 성폭력이 범죄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사회 일부에 왜곡된 성 관념은 남아있다. 여성과의 성관계를 ‘홈런 쳤다’ ‘따먹었다’고 표현하는 게 대표적이다. 연인 사이에서 남성이 스킨십을 리드해야 하고, 여성은 성적으로 개방적이어서는 안 되는 등 특정 성별에 특정 역할을 기대하는 시각도 일부 남아있다.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상대에 대한 존중과 성적 동의에 대한 적극적인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이미정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적 시각과 문화 때문에 성적으로 공격적인 것이 남성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례가 적지 않다”며 “특히 성적으로 더 자유로운 시대에 사는 젊은 세대에게 성관계에서 무엇이 동의인지, 동의를 구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어떻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별 맞춤형 성교육 프로그램 도입도 고려할 만하다. 성별로 분리된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남성들이 비교적 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도 많이 줄어들었다는 해외 연구가 있다. 이 연구위원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묘사하는 접근에서 벗어나 문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할 수 있도록 전면적인 성교육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군인과 스포츠 선수를 대상으로 폭력 예방 교육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잭슨 캐츠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묘사하는 대신, ‘폭력적 남성성(violent masculinity)’의 문화를 중단하는데 이들이 동참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캐츠는 “대부분의 남성은 주변에서 남성이 여성을 폭력으로 위협하는 상황을 목격해왔다”며 “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해야 여성을 향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성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성의 주도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이 연구위원은 “성적 대화가 오가는 단톡방 등을 목격한 남성들이 침묵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고 저지해야 한다”며 “각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성희롱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인식 변화의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윤혜인·오유진 기자 yun.hy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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