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 하청노조 임금 못 올렸지만.."이 합의서 쓰는데 6년 걸렸다"
파업 전 수준 '임금 4.5% 인상' 합의
내년부터 상여금 140만원 지급키로
폐업 하청 노동자 고용승계도 노력
파업 손해 '민·형사 책임' 추후 논의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51일, 옥포조선소 제 1도크(배를 만드는 작업장) 점거 투쟁 31일이 하청업체 대표들과의 협상 타결로 마무리됐다. ‘1㎥ 철제 구조물에 갇힌 노동자’로 상징되는 조선하청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지만, 애초 요구였던 임금 인상 등을 관철하지 못했고 파업 피해에 대한 민·형사상 면책도 매듭짓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조선하청지회)와 ‘대우조선해양 사내협력회사 협의회’는 22일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정회와 속개를 거듭한 끝에 △4.5%(업체별 평균) 임금 인상 △내년부터 설·추석 각 50만원과 여름휴가비 40만원 등 상여금 140만원 지급 △고용계약 최소 1년 단위 체결 △재하도급 금지 △폐업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최우선 고용하기 위해 노력 등 방안에 잠정 합의했다. 이후 열린 조선하청지회 조합원 총회 투표에서 90% 이상 찬성으로 이 합의안을 가결했다.
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은 31일간 진행했던 옥포조선소 제1도크(배를 만드는 작업장) 점거농성을 해제하고 업무에 복귀하기로 했다. 유최안 부지회장은 31일 동안 자신을 ‘1㎥ 철제 감옥’에 가둔 채, 나머지 6명의 노동자는 15m 난간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여왔다. 유최안 부지회장은 스스로 용접했던 철제 감옥에서 나와 병원으로 이송됐다. 경남경찰청 쪽은 “시설물을 점거하고 있던 조합원들이 장기간 농성으로 인해 건강상 문제가 있을 것으로 보이는 만큼, 우선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이후 관계인 조사를 마치는 대로 신속히 처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지난 15일 협상이 시작된 이후 19일부터 본격적으로 ‘타결 임박’ 관측이 흘러나왔으나, 노사는 이날도 파업 손해 면책과 고용승계를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정회와 속개를 반복하다 오후 4시께 극적으로 합의안을 도출했다.
하지만 이번 합의내용은 ‘임금 30% 인상’ 등 조선하청지회가 지난달 2일 파업을 시작하면서 요구했던 수준에는 크게 못 미친다. 노조는 최근 조선업 호황을 맞아 2016년부터 시작된 조선업 불황으로 삭감된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을 회복해야 한다는 취지로 큰 폭의 임금 인상을 요구해왔다. 대우조선 원·하청이 경영난 등을 주장하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음에 따라, 조선하청지회는 올해 초 협력업체별로 이미 인상한 4~7% 수준(평균 4.5%)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노사 양쪽은 하청업체 저임금구조 개선방안 등을 논의하는 티에프(TF)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임금뿐 아니라, 막판 쟁점이었던 민·형사상 면책과 고용승계에서도 조선하청지회의 입장이 관철되지 못했다. 이날 하청 노사는 폐업한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전원 고용승계’ 하는 대신 ‘최우선 고용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조선업계에는 통상 한 하청업체가 폐업하면 같은 직종의 다른 업체가 인원을 승계하는 관행이 존재했다. 하지만 하청업체 쪽이 최근 파업을 전후해 폐업한 업체 노동자들에 대한 고용승계를 거부하면서, 협상 막판 걸림돌로 작용해왔다.
교섭 막바지 사흘간 노사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해 온 ‘파업 손해에 대한 민·형사상 면책’ 문제는 이날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조선하청지회쪽 교섭위원으로 참여한 홍지욱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면책 관련해서는 남은 과제로 남겨놨다”며 “앞으로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7천억원 피해”를 주장하며 손배소를 예고한 대우조선해양은 “당사는 파업과정에서 발생된 제반 문제에 대해 법과 원칙의 기조에 따라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형수 조선하청지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작년에 (금속)노조 조끼 입고 교섭장 들어갔다고 회사는 교섭 거부했다. 금속노조 이 이름 하나 합의서에 넣기 위해 6년 싸웠다”며 “오늘 드디어 초라하고 걸레 같은 합의서지만 금속노조 이름을 넣을 수 있게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파업에 참여한 한 조합원 역시 <한겨레>에 “그래도 하청노동자들이 언제 단체교섭을 해보겠느냐. 이게 하나의 역사라고 생각하고, 금속노조 도장 찍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말했다.
권수오 사내협력회사 협의회장은 “국민적 관심과 지역민, 대우조선 관계사 가족들의 관심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며 “잠정합의안 타결 이후 노사 상생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원청 대우조선도 이날 “지금부터 지연된 생산공정 만회를 위하여 모든 역량을 투입할 예정이며, 또한 원하청 상생협력을 위해서도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금 인상 등 파업의 목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선박 건조를 위해 필수적인 진수(공정이 끝난 배를 도크에서 안벽으로 옮기는 작업)를 하지 못할 정도로 생산공정에 큰 차질을 빚었던 이번 투쟁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조선하청지회는 지난해부터 임금인상을 위한 개별교섭을 진행하다 진전이 없자, 하청업체 집단교섭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점거농성이 장기화되고 노동부·산업부 장관이 사태 해결을 요청하는 담화문을 발표한지 하루 만인 지난 15일부터 하청업체들과 노조 사이의 집단교섭이 시작됐다. 진작 집단교섭이 있었다면 사태가 장기화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원·하청 구조에서 하청노동자에 대한 권리보장 방안은 이번에도 큰 논란이 됐다. 원청이 지급하는 ‘기성금’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하청업체의 특성상, 하청노동자들의 임금 등 노동조건은 원청에 많은 결정 권한이 있다. 점거 농성이라는 ‘극단적 투쟁’이 하청 사용자는 “권한이 없다” 하고 원청은 ‘뒷짐’지는 구조 때문에 시작된 셈인데, 원청은 이번 사태 해결 과정에서 교섭 첫날 테이블에 앉았을 뿐 이후 등장하지 않았다. 조선하청지회의 투쟁 과정에서 노동법률가단체들은 한국 정부가 비준한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자유 협약을 근거로 “하청노조의 단체교섭 요구에 원청 사용자가 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조선하청지회의 이번 파업은 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시민들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조선업 경기가 살아나 인력난이 문제로 손꼽히면서도 하청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은 여전히 낮았다. 또 하청업체의 사회보험료 체납·임금체불 등 조선업계 ‘불법일터’ 문제가 이번 투쟁을 통해 사회적 주목을 받았다. 이에 이정식 노동부 장관은 지난 19일과 20일 이틀동안 대우조선에서 조선하청지회를 만나 “농성을 해제하면 구조적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일부 조합원들은 파업 도중 임금을 받지 못해 대출을 당겨쓰며 생활비를 충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연대하기 위해 조선하청지회가 추진한 ‘1만×1만 기금’ 프로젝트 모금에 1억원 넘는 돈이 모여 155명 파업 참가자의 180만원 생활비로 쓰였다. 20개 도시 시민 2천여명을 태운 ‘희망버스’도 23일 거제로 집결해, 당초 예정된 조선하청지회 연대 투쟁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거제/ 박태우 기자 ehot@hani.co.kr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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