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클래식 음악가가 '아미 헌정곡' 만든 이유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하아~" 가장 사랑하는 방탄소년단(BTS) 노래를 묻자 헨리 청(38)은 한참이나 고민하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어렵사리 입을 떼서는 "《피 땀 눈물》을 좋아하긴 하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노래는 《영 포에버(Young Forever)》다. 음… 사실 모든 곡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미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그는 최근 BTS 팬클럽 아미(ARMY)에게 헌정하는 클래식 음악을 선보였다. 7월1일 개막한 BTS 관련 현대미술 전시회 《비욘드 더 신(Beyond the Scene)》을 통해서다. '스위트 포 아미(Suite for ARMY·아미를 위한 모음곡)'로 명명된 이 곡은 전시의 테마 뮤직으로 사용됐다.
글로벌 무대에서 맹활약 중인 클래식 음악가가 돌연 BTS에 푹 빠져 아미 헌정곡을 내놓았다는 사실은 세간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스위트 포 아미'엔 《노 모어 드림(No More Dream)》 《상남자(Boy In Luv)》 《뱁새》 《피 땀 눈물》 《봄날》 《페이크 러브(FAKE LOVE)》 《작은 것들을 위한 시(Boy With Luv)》 《욱(UGH!)》 《Young Forever》 《다이너마이트(Dynamite)》 등 BTS 노래 10곡이 녹아들어 있다. 헨리 청은 "BTS 노래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돼온 클래식 음악적 요소와 BTS가 아미와 함께 걸어온 여정에 대한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스위트 포 아미'를 작곡했다"며 "언젠가 아미로 구성된 풀오케스트라가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BTS '찐팬'인 그를 《비욘드 더 신》 전시장인 서울 평창동 토탈미술관에서 7월18일 만났다.
《비욘드 더 신》 전시회를 위해 '스위트 포 아미'를 작곡한 건가.
"아니다. 1년 반 전쯤, 그러니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만들었다. 여느 클래식 음악가들과 마찬가지로 콘서트 등 일정이 한꺼번에 취소되면서 본의 아니게 휴지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앞서 한국인인 아내(큐레이터 죠앤 킴)로부터 BTS 음악을 들어보길 권유받고 (BTS 노래들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한 곡 한 곡을 꼼꼼히 분석하고 내 방식대로 고쳐 보다가 모음곡까지 쓰게 됐다. 혼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다 탄생한 곡이 세상에 이렇게 알려진 게 신기하고 얼떨떨하다."
전시의 테마 뮤직으로 선정된 배경은.
"애초에 아내와 함께 장모님을 뵈러 한국에 왔다. 온 김에 평소 알고 지낸 신보슬 토탈미술관 책임큐레이터를 만났는데, 《비욘드 더 신》 전시 계획을 전하더라. 자연스레 나와 아내가 '스위트 포 아미' 얘기를 꺼내며, 신 큐레이터에게 들려줬다. 신 큐레이터가 '좋다, 함께 해보자'고 했고, 전시 테마 뮤직 선정과 오프닝 공연, 전시와 연계된 'BTS 글로벌 학제 간 학술대회' 오프닝 공연 등으로 이어졌다."
작곡 계기와 널리 알려진 과정 모두에 우연이 개입했다.
"그야말로 '세렌디피티(serendipity·우연한 행운)'다. 갑작스레 공연하게 돼 부랴부랴 슈트도 새로 샀다(웃음)."
'스위트 포 아미' 작곡을 통해 얻은 성과나 인사이트가 있다면.
"BTS를 매개로 전 세계의 아미와 공감대를 이루는 즐거움이 무엇보다 컸다. BTS의 음악을 알면 알수록 왜 그토록 수많은 사람, 특히 젊은 세대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었는지가 납득됐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음악가로서 엄청난 영감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전시회 참여 전후로는 '베토벤 BTS'라는 이름의 다른 프로젝트도 시작하게 됐다."
전시회와 학술대회의 오프닝 공연 무대에는 바로 이 '베토벤 BTS' 프로젝트로 작곡한 음악이 올라갔다. 헨리 청이 베토벤 교향곡과 BTS 음악 양쪽에서 영감을 얻고 재해석해 만든 클래식곡이다. 풀오케스트라가 필요한 '스위트 포 아미'와 달리 실내악 형식이라 '세렌디피티'로 급히 준비해야 했던 이번 공연에 제격이었다.
작곡 방식은 '스위트 포 아미'와 '베토벤 BTS' 프로젝트가 비슷했다. '스위트 포 아미'엔 바그너,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스트라빈스키 등의 클래식곡과 BTS 노래가 어우러졌다. BTS 원곡들에도 쇼팽 《이별의 왈츠》, 바흐 《나단조 미사》, 드뷔시 《달빛》 등이 직간접적으로 인용돼 있어서인지 클래식 음악과의 조화가 전혀 생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헨리 청의 손길이 닿은 두 프로젝트는 시대를 초월해 클래식 음악가들과 BTS 멤버들을 강하게 연결했다. 헨리 청은 BTS 노래 각각의 주제와 음악적 메시지, 철학, 작곡 기법과 연결되는 클래식 음악가들을 떠올리며 곡을 만들었다.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클래식 음악가들과 BTS를 연결했나.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좋은 예술이라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마련이다. (이번 프로젝트에 인용한) BTS 노래와 클래식 음악에서 아티스트의 가치관은 물론 사회·정치·문화적 메시지도 두루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특징은 우리네 삶에 반향을 일으키는 힘을 지녔다.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나는 누구인가' '사랑은, 그리고 상실은 무엇인가'와 같은 고민 역시 인류가 음악을 빌려 던져온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통하는 부분이 많아 연결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여러 클래식 음악가 중에서도 베토벤을 BTS와 닮은꼴로 꼽았는데, 이유는.
"베토벤과 BTS를 연구해 보면 삶의 철학을 음악으로 표현하거나 음악 형식에서도 혁신을 추구하는 등 겹치는 대목이 많다. 개인적으로 두 아티스트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스위트 포 아미'에 인용한 BTS 노래 중 가장 사랑하는 것은.
"다 좋아하는 노래라 얘기하기가 쉽지 않다. 《피 땀 눈물》이 먼저 떠오르긴 하지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곡은 《Young Forever》다. 2019년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BTS 공연에서 팬들이 이 노래를 BTS 멤버들에게 불러줬다. BTS 멤버들은 감정이 북받쳐 펑펑 울었다. 그 순간 멤버들은 K팝 시스템의 정점에 있는 대중가수가 아닌 한 명의 사람이었다. 너무 아름답고 강렬했다."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앞으로의 비전은.
"사실 잘 모르겠다. 일단 BTS 관련 프로젝트를 비롯해 오페라, 발레, 다큐멘터리 필름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내 안에 어떤 게 있는지를 계속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잘 지나며 그때그때 내 안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깊이 나눌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아,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스위트 포 아미'를 아미로 이뤄진 풀오케스트라로 연주해 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일이 꼭 실현되면 좋겠다."
■ 헨리 청(Henry Cheng)은
1984년 대만에서 태어나 7세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미국 이스트만 음악대학과 인디애나 음악대학, 독일 베를린 국립예술대학을 졸업했다. 2017년부터 독일 뒤스부르크에 있는 클랑크라프트 오케스트라의 수석지휘자이자 예술감독을 맡아왔다. 2018년 안탈 도라티 콩쿠르, 유럽연합 지휘 콩쿠르에서 1등을 거머쥐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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