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들, 왕실 친척 '호화 혼수' 조사하고 왕비 무덤 경비까지.. 잡다한 일 도맡아

기자 2022. 7. 2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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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유종 기자
MBC 드라마 ‘마의’의 한 장면.

■ 박영규의 지식카페 - (10) 의녀들의 직장 생활 Ⅱ

女죄수 몸 수색하고 임신 여부도 판별… 연산군 시절엔 기생처럼 불려가 술 따르고 악기 연주

궁녀와 달리 혼인 가능했지만 비천한 신분에 결혼 전부터 박대받기 일쑤… 양반 첩으로 들어가 신분 상승

의녀의 기본 임무는 간병이다. 그리고 부인병에 대해서는 의원으로서 진맥, 시침하고 임산부에겐 조산원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처방은 의원을 통해 해야 하며, 직접 약 처방을 지시할 순 없다. 이렇듯 의녀는 여의(女醫)로서 부인병에 한정해 일정 정도 의사로 활동했고, 대개의 임무는 병자를 간호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의녀의 임무는 단순히 의료와 관련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종 38년 2월 10일에 병조판서 임권, 형조판서 신광한, 포도대장 김공석 등이 도적의 발생 원인과 야간 순시에 관해 올린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도적이 사족의 집에 숨어 있으면 먼저 아뢰고 나서 잡는 것이 예사인데, 계품하느라 왕래하는 동안 도망하여 달아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군사로 그 집을 포위해 놓고 부인들은 피해 숨게 하고서 체포한 뒤에 그들의 체포 여부를 아뢰게 해 주소서. 또 도적이 부인들의 차림으로 변장하고 숨는 일도 있으니 의녀를 시켜 부인의 면모를 살펴보게 함으로써 도적들이 도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글에서 보듯 의녀들은 여자 경찰 역할을 하고 있다. 여자 경찰로서의 의녀의 임무는 이것뿐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결혼 혼수를 과다하고 사치스럽게 하는 것을 국가에서 금지하고 있었는데, 왕실 척족들과의 혼인에는 유달리 예물이 지나쳤다. 이런 사건이 보고되면 부인들의 방은 남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터라 의녀들로 하여금 조사토록 했다. 또 종친 중에 어머니나 부인의 병을 핑계하고 종학에 나오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의녀들을 종친의 집으로 파견해 여자들을 진찰하도록 했다.

여성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여성의 몸을 살피는 것도 의녀들의 몫이었다. 이때 의녀들은 몸을 수색하는 것은 물론이고, 맥을 짚어 임신 여부를 판별하기도 했다. 만약 사형당할 여자 죄수가 임신을 했으면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사형 집행을 연기했다가 아이를 낳은 후에 집행했기 때문이다. 또 임신 중에 형신을 가하면 임산부와 아이가 모두 죽을 수 있으므로 여자 죄수의 경우 반드시 의녀들이 임신 여부를 먼저 판별하도록 했다.

궁중의 여관들이 죄를 지었을 때, 그들을 체포하는 것도 의녀들의 몫이었다. 또한 갇힌 궁녀에게 음식을 갖다 주고, 건강 상태를 확인해 보고하는 것도 의녀의 임무였다. 그러나 죄지은 사람이 궁중의 나인이나 상궁이 아닌 비자라면 의녀가 그들을 시중들지 않았다. 여관 말고도 후궁이나 어린 왕자를 잡아들이는 일도 의녀가 했다. 광해군 시절에 영창대군을 끌어낸 것도 여관들이 아니라 바로 의녀들이었다.

의녀를 흔히 약방기생이라고도 하는데, 이때 약방기생이라고 불린 의녀들은 혜민서의 의녀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연산군 시절에 혜민서 의녀들을 동원해 기생처럼 술을 따르고 음악을 연주토록 했는데, 연산군이 내쫓긴 뒤에도 의녀를 여악(女樂)으로 쓰는 일이 잦았다. 중종은 재위 12년 8월 25일에 의녀를 사대부의 연회장에 데려가지 못하도록 지시했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왕비의 능을 옮기거나 조성할 때, 왕비의 능은 남자가 시위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왕비나 후궁의 무덤을 지키는 일도 의녀들이 맡았다. 왕이 밤에 궁궐 바깥에서 거동할 때 횃불을 드는 역할도 의녀의 몫이었고, 후궁이 죽으면 누군가 그 제문을 읽어야 하는데, 제문을 읽는 역할도 의녀에게 시켰다.

이렇듯 의녀는 단순히 의술에 관한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온갖 잡다한 일을 다 수행해야 했는데, 때론 이런 일들에 의녀를 동원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상소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왕이 의녀에게 의녀 본분의 일 외의 것을 시키지 말라고 했으나 끝내 고쳐지지 않았다.

의녀들은 일반 궁녀와 달리 결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분이 미천한 만큼 매우 천시됐고, 제대로 된 혼인도 하지 못했다. 거기다 가정생활도 매우 어려웠다. 의녀는 결혼 전부터 박대받는 생활을 하기 일쑤였는데, 중종 24년 7월 20일에 종결된 오윤산 사건은 당시 의녀의 가정생활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당시 오윤산 사건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사건 내막은 이렇다. 오윤산에게 금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금이는 오윤산의 전처가 낳은 딸이다. 그런데 금이가 어느 날부터 배가 불러오더니 임신을 했다. 이후 동네에는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금이를 임신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생부 오윤산이라는 소문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의금부에서는 즉시 오윤산을 잡아들였다. 생부가 딸을 범했다면 용서할 수 없는 대죄였던 것이다.

의금부에선 오윤산을 취조하는 한편, 소문의 진원지를 찾기 위해 탐문을 벌였다. 탐문 과정에서 소문의 진원지가 관남과 정금이라는 두 여자라는 것이 밝혀졌다. 관남은 오윤산의 두 번째 아내였고, 정금은 관남이 전남편에게서 얻은 딸이었다. 결국 정금과 관남이 의금부로 잡혀들어왔고, 형신이 시작됐다.

형신을 하고 취조하니, 정금이 말하길 오윤산이 금이를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치마를 벗기고 간음하는 것을 봤다고 했다. 관남 또한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두 여자는 공히 그 내용을 차막송도 안다고 했다. 차막송은 오윤산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었다. 그래서 차막송을 취조해 보니, 그는 중근에게 들은 말이라고 했다. 중근은 오윤산의 사촌 손자였고 당시 나이는 불과 13세였다. 의금부에서 중근에게 물어봤더니, 중근은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했다. 중근의 나이가 너무 어려 형신을 가하지 못하던 의금부는 결국 중근을 겁주기 위해 형틀을 차려 놓고 다시 물으니, 모두 정금과 관남이 시킨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 내막을 따져보니 결론은 이랬다. 오윤산이 아내인 내섬시 관비 관남을 너무 박대하자, 관남은 윤산의 딸 금이가 임신한 사실에 근거해 오윤산을 모함하기로 했다. 이 일에 의녀인 딸 정금이 동조했고, 모녀는 다시 금이가 임신한 사실이 탄로 날까 노심초사하던 막송을 회유해 동참시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 중근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이 일을 벌인 동기에 대해 내섬시 관비였던 관남은 이렇게 말했다. “남편 오윤산이 내가 가산을 훔쳐다가 딸에게 준다고 하면서 술만 취하면 화를 내며 때렸고, 수시로 내쫓기도 했다. 그래서 견딜 수 없어서 모해하고자 했다. 모해할 방법을 찾다가 오윤산이 자기 딸 금이와 간통했다고 여러 마을에 소문을 냈다.”

그리고 의녀였던 관남의 딸 정금은 이렇게 말했다. “오윤산이 내가 의녀라고 평소 박해했고, 집 안에서도 심하게 일을 시켰으며,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하게 했다. 이 때문에 모해할 계책을 세우고 그의 딸 금이가 임신한 사실에 근거하여 금이와 간통했다는 것을 날조하여 전파했다.”

이 사건으로 관남은 참형에 처해졌고, 정금은 장 100대를 맞고 삼천리 밖에 유배됐으며, 삼 년간 도역이 부과됐다. 오윤산이 정금이 의녀 신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며 함부로 집 밖으로 출입도 못 하게 했다는 것은 의녀들이 당시 얼마나 천시됐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당시 관비였던 정금의 어머니 관남의 삶은 같은 처지의 관비 신분인 의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국대전’의 다음 법조항은 의녀들의 결혼 생활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첩이 된 의녀가 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낳은 아들은 양인이 됨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잘 분석해보면 의녀들은 누군가와 정식으로 혼인하기 전에 임신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종 19년 1월 14일에 성세명은 성종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의녀와 기녀는 본래 정한 지아비가 없으므로 아들을 낳으면, 천인의 아들을 가지고 귀족의 아들이라고 한답니다. 관리는 그 어미의 말에만 의존해 기록하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의녀와 기녀의 소생을 적에 올릴 때에는 그 아비에게 물어서 기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세명의 말에 따르면 의녀도 기녀처럼 정해진 남편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여러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의녀들은 어떻게 해서든 천비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썼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양반의 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작가

■ 용어 설명 - 혜민서

조선 시대 일반 서민을 치료한 관청. 가난한 백성은 무료로 치료해주고, 여성들에겐 침술을 가르쳤다. 태조 초기 고려 제도를 계승해 혜민고국(惠民庫局)을 설치한 뒤 1466년(세조 12) 혜민서로 개명했다. 흔히 말하는 ‘약방기생’은 혜민서에서 일한 의녀를 지칭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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