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존 구한 슈퍼마리오'에게도 높았던 이탈리아 현실정치의 벽(종합)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출신인 마리오 드라기(74) 총리가 21일(현지시간) 사임하면서 1년 5개월간의 정치 여정에 사실상 마침표를 찍었다.
정국 관리 책임자인 세르조 마타렐라 대통령이 오는 9월 조기 총선 실시를 결정하면서 드라기 총리에게 총선 때까지 임시 관리 내각 운영을 맡겼으나 공식적인 총리 직무는 마감한 셈이다.
드라기 총리는 작년 2월 당시 주세페 콘테 총리가 이끌던 연립정부가 내분으로 붕괴하자 정국 위기는 물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부른 사회·경제 위기를 해소할 '소방수'로 마타렐라 대통령의 긴급 호출을 받았다.
당시 정계 안팎에서는 이탈리아의 중첩된 위기를 해소할 적임자라는 기대가 컸다.
사실 드라기 총리는 전 세계 경제·금융권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언급된다.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금융경제통'으로 학계·정부·금융권을 두루 거친 그는 2011년 11월 유럽 통화 정책을 총괄하는 ECB 총재로 취임하고서 8년간 유럽 경제의 격동기를 함께했다.
남유럽 재정위기가 한창이던 2012년 7월 짧고도 강렬한 연설은 지금도 회자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그리스 등의 채무불이행(디폴트)과 이에 따른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19개국) 붕괴 우려로 투자자들이 유럽 채권 매입을 꺼리자 "유로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 나를 믿어달라"는 한마디로 금융시장의 불안을 잠재웠다.
그의 말을 신뢰한 투자자들은 다시 유럽 채권을 매입하기 시작했고 유로화도 달러 대비 강세로 돌아서며 최악의 위기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ECB가 그동안 시행해온 회원국 국채 매입을 통한 양적완화 정책을 처음 도입한 것도 드라기가 총재로 있던 때다.
이런 이유로 그의 이름 뒤에는 '유로존을 구한 슈퍼 마리오'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2019년 퇴임 이후 별다른 공직을 맡지 않았으나 이탈리아 정계에서는 언제나 '총리 후보 1순위'로 거론됐다.
세계 경제 부문의 이러한 업적과 위상은 총리로 호명된 후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팬데믹이 초래한 복합적 위기 국면에서 정치권의 단합을 호소한 그에게 주요 정당들은 이념과 관계없이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당시 의회 최대 의석수를 가진 오성운동(M5S)은 물론 범좌파 진영의 수장 격인 민주당(PD),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창당한 중도 우파 정당 전진이탈리아(FI), 마테오 살비니 상원의원이 당수인 극우당 동맹(Lega) 등이 모두 정부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이른바 '좌·우 거국 내각' 진용이 짜였다. 상·하원 전체 의석의 80% 이상을 점하는 절대 과반을 확보한 것이다.
출범 초기 드라기 내각은 총리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리더십, 의회의 광범위한 지지를 등에 업고 각종 경제·사회 개혁을 속도감 있게 추진해나갔다.
팬데믹 사태 여파로 2020년 성장률이 -10%로 곤두박질쳤던 경제도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국제 금융계에서는 드라기 총리의 존재 자체가 이탈리아 경제에 안정감을 더해줬다는 평도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념 성향과 지지 기반이 다른 정당 간 대립과 갈등의 수위가 높아졌고, 그만큼 주요 현안을 둘러싼 연정 내 위기론도 수시로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내년 상반기로 예정된 총선이 가까워져 오면서 정당들이 국정 원칙보다 자당의 지지층 고려한 정책 수립을 우선한 것도 하나의 배경이 됐다.
특히 드라기 총리에게 자리를 물려준 콘테 전 총리가 작년 8월 오성운동의 당수로 선출된 것은 불길한 신호였다. 이때부터 드라기 총리와 오성운동 간 관계의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는 게 현지 정가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결국 오성운동은 지난 14일 내각이 입안한 민생법안의 상원 표결을 보이콧하면서 파국으로 향하는 불씨를 댕겼다.
오성운동은 최저임금제 도입·기본 소득 제공 등 당의 핵심 정책들이 뒤로 밀리는 등 정책적 견해차가 컸다는 점을 그 사유로 언급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오성운동이 총선을 앞두고 지지율을 끌어올리고자 '벼랑 끝 전술'을 택한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편에서는 콘테 전 총리가 결과적으로 자신을 총리직에서 끌어내린 드라기 총리에 '정치적 복수'를 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 배경이 어떻든 간에 오성운동의 대오 이탈은 드라기 총리 사퇴와 내각 붕괴, 의회 해산, 조기 총선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후폭풍이 돼 국가 전체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에너지 위기와 물가 상승으로 민생 불안이 가중되고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발생한 국정 공백의 피해자는 이탈리아 국민일 수밖에 없다는 국내외 비판도 고조되는 모양새다.
9월 25일 실시될 조기 총선에서 어느 당도 단독 과반 구성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주요 정당 간의 연립정부 구성 협상 기간까지 고려하면 수개월 간의 정국 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2018년에도 총선 종료 후 내각 출범까지 3개월가량이 소요된 바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21일 관련 기사에서 "드라기 총리가 남유럽 부채 위기의 절정에서 유로화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탈리아 정당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데는 실패했다"면서 "그 타이밍이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짚었다.
이번 사태를 통해 국가적 위기에 아랑곳없이 자당 이기주의가 득세하는 이탈리아 정치의 고질적인 구태와 불안정성이 다시 한번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도 많다.
드라기 내각은 2018년 3월 총선을 통해 구성된 현 의회의 세 번째 내각이다. 아울러 전후 67번째 내각이기도 하다. 내각의 평균 존속 기간이 고작 1년 남짓에 불과한 셈이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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