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홍국영 스토리: 권력자가 편애했던 사나이

유석재 기자 2022. 7. 22. 00: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드라마 '이산'에 등장했던 홍국영(한상진 분). /MBC

“얼굴이 잘생겼고 눈치가 빨랐으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다. 글이 재치가 있었으며 예리했다.”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과 심낙수의 ‘은파산고’ 등 18세기 후반 동시대의 기록에서 이런 평가를 받았던 인물은 누구였을까요.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의 최측근이자 실권자였던 홍국영(洪國榮·1748~1781)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친구들에게 “내 손아귀에 천하 모든 일이 들어오게 되는 날이 오리라”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경이 없었으면 어찌 오늘날의 내가 있었겠는가!”

즉위 초 정조는 홍국영에게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보였습니다. 조정에선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란 말까지 돌았죠. 그가 측근 중의 측근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비명횡사한 이후 위험에 빠졌던 세손 시절의 정조를 보필한 인물이 홍국영이었던 것입니다.

1777년(정조 원년) 3월 29일 정조가 내린 비답(임금이 상주문의 끝에 적는 대답)은 마치 울며 쓴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선왕 말년에 불령한 무리들이 나를 원수처럼 여기고 핍박했으나... (홍국영은) 피를 토하면서 역적들과 함께 살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내 몸을 보호해 간사한 싹을 꺾었다...” ‘나는 반드시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강한 의지가 읽힌다고 해야겠죠.

이제 홍국영은 정조의 정적(政敵)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는 ‘칼잡이’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세자를 배척했던 노론 벽파가 주요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조의 외척 세력인 홍인한의 숙청을 홍국영이 맡았다는 것이 주목됩니다. 오래도록 권력의 핵심을 이뤘던 풍산 홍씨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을, 같은 풍산 홍씨면서도 비교적 한미한 방계였던 홍국영의 손으로 처단하게 한 셈이었습니다. 실로 ‘아싸’(아웃사이더)가 ‘인싸’를 치게 하는 절묘한 방식의 권력개편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조의 초상. photo 조선일보 DB

정조 초기 홍국영은 도승지와 규장각 제학, 훈련대장 등의 요직을 맡으며 왕에 버금가는 최고 실세로 부상했습니다. 그런데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얻었다는 이유로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며 많은 사람들의 불만을 사던 그는 1779년(정조 3년) 9월 돌연 스스로 사직하겠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 배후에는 ‘더 이상 홍국영을 안고 가는 것이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정조의 판단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아들을 임금의 양자로 삼는 등 후계 구도에 지나치게 개입하려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죠.

정조는 고심 끝에 은밀하게 홍국영을 불러 “모든 직책을 버리고 떠나라”는 말을 전했고, 홍국영은 곧바로 사직서를 냈습니다. 이 같은 전후 상황을 모르던 많은 신하들은 당황한 나머지 홍국영의 사직을 만류하라고 청했습니다. 아직 최고 권력자의 본심을 읽지 못한 단계에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홍국영으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홍국영은 그대로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떨어져 나간 그는 한양 도성 출입이 금지되는 벌을 받았고 재산마저 몰수당했습니다. 강릉 근처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한 홍국영의 말년에 대해 야사에선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봉두난발로 굼벵이를 잡아먹기도 하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삿대질을 하며 ‘저 자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소리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 이야기에선 홍국영의 최후가 비참하기를 바랐던 민심(民心)이 읽힙니다. 홍국영은 쫓겨난 지 2년 뒤인 178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원로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홍국영을 불행하게 만든 책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정조에게 있었다. 경험과 경륜이 모두 미숙한 그를 지나치게 믿고 의지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200년도 더 지난 역사 속 인물의 행적에서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기도 하지만, 역사상의 인물을 반드시 현재의 특정 인물 한 명에게만 대입시킬 수는 없다는 걸 깨닫고 곤혹감이 들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이미 홍국영의 길을 걸었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홍국영이 막 득세하는 단계에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개인의 청렴, 인간적 함량, 실무적 능력, 정치적 추진력,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 후안무치와 멘탈갑의 상황을 차마 견딜 수 없을 양심의 정도, 그리고 스스로 집권자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처신할 수 있는 현명함이 향후 그 길을 다르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 뉴스레터 구독하기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79194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