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다룬다고..국회의원 '문화다양성 강연'도 무산
경기 안양시에서 문화다양성을 주제로 진행될 예정이었던 행사가 일부 기독교·보수단체의 반발로 무산됐다. 성평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특정 세력의 압력 탓에 좌절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1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시민단체인 안양나눔여성회는 지난 7일부터 다음달 18일까지 문화다양성 기반구축사업의 하나로 ‘#이제내가쓰지않는말들in안양’이라는 제목의 강연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다. 총 5회로 구성된 프로그램은 장혜영 정의당 의원을 비롯해 차별금지법제정연대, 한국다양성연구소 관계자 등의 강연으로 구성됐다. 강연 주제는 차별금지법의 현주소와 페미니즘과 다양성 이해 등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첫 강연조차 열리지 못하고 중단됐다. 안양시와 안양문화재단이 각각 후원과 주최로 참여해 시예산이 투입됐는데, 두 기관에서 ‘프로그램을 잠시 중단했으면 좋겠다’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유는 시와 재단으로 쏟아지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기독교단체와 시민단체들의 반발이었다.
시청과 재단은 지난달 25일부터 행사 취소가 결정된 30일까지 일주일가량 업무를 보지 못할 정도의 민원 전화에 시달렸다. 시청 앞에서 1만명 규모의 집회를 열겠다는 협박성 내용까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단체는 지난달 30일 안양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양시민다양성 교육을 취소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조치를 마련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프로그램을 주관한 안양나눔여성회는 공무원과 활동가 보호를 위해 행사를 취소했다. 안양나눔여성회를 비롯한 안양시민사회연대회의는 이번에 취소된 프로그램을 시예산이 아닌 시민들의 모금을 바탕으로 9월쯤 재추진할 계획이다.
안양나눔여성회 관계자는 “프로그램에 관한 소식이 알려지자 일부 세력이 폭력적 언행으로 안양시 공직자와 단체 활동가들을 위협했다”면서 “취소된 프로그램은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었고,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살펴보는 인문학 프로그램이었다”고 말했다.
일부 세력의 반발로 지역사회의 다양성 추구 움직임이 멈춰 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안양나눔여성회만 해도 지난해 말 비슷한 일을 겪었다.
여성회는 앞서 ‘젠더 감수성으로 도시 읽기’를 주제로 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해당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사무실로 “‘젠더’를 다른 단어로 바꿔라”라는 민원이 빗발쳤다. 결국 여성회는 ‘젠더’를 ‘성인지’로 수정했다.
2020년 ‘나다움 어린이책 회수 사건’도 대표적인 예다. 성관계와 출산을 설명한 일부 책의 내용이 선정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서울시 내 도서관 등에서는 대출 금지가 이어졌다. 여성가족부는 서적 일부를 회수하는 조치까지 내렸다.
시민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목소리 크면 된다’는 식의 부정적인 선례를 남기는 것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이하나 안양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대변인은 “민원에 응대할 수 밖에 없고, 업무방해에 관한 사법적 대응이 불가능한 공무원들의 사회적 지위를 악용하는 것으로 의심된다”면서 “이번 일이 ‘사회적 다양성’에 반대하는 세력들에게 승리 신화가 되고, 하나의 억압 도구로 쓰이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행정기관이 분명한 잣대를 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경식 안양시민사회정책연대 집행위원장은 “집단 반발이나 민원을 이유로 시민들이 준비한 행사를 중단하다 보면 결국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은 사라질 것”이라며 “이번 일도 안양시가 명확한 기준을 두고 판단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안양문화재단 관계자는 “재단으로서 정치적으로 너무 큰 이슈가 됐다”면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우선은 중단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김태희 기자 kth0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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