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너머의 가장 '힙'한 음악.."전통 깨고 나온 무대 위 14개의 전구"
2000년대 이후 국악계 신풍 주역
'2022 여우락 페스티벌'로 한 자리에..
경계와 한계 너머의 음악
전통을 토핑 삼아 새로운 시도
다른 장르와의 만남 통해 확장
국악기로 새 주법·박자·선율 실험
오는 22~23일 '여우락 익스텐션' 무대
14개의 전구가 하나로 연결된 세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고루하다고 생각했던 ‘음악의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박제된 전통’을 잇고 있다는 편견은 이들 앞에 조각났다. 어쩌면 가장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음악, 끊임없는 새로움이 도사리는 음악이었다. 대중에게 ‘전통 음악’은 지켜야 할 음악처럼 보이지만, 이들에게 ‘전통’은 “가장 맛있는 토핑이자 향신료”(박우재)가 됐다.
“산조라는 전통의 장르도 그 옛날 엔터테이너들이 멋있으려고 했던 음악이에요. 이제는 그 정신이 사라지고, 교육으로 배우니 박물관 음악이 된 거죠. 그 시절 자기 음악을 하던 인간문화재 선생님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음악, 새로운 음악을 하고 있어요. 그 소재가 전통인 거고, 그건 가장 맛있는 재료가 된 거예요.” (무토 박우재)
“거문고, 피리, 해금 등 저희가 연주하는 것을 전통악기로 규정하는 순간, 전통에 머무른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 악기들은 그 시대의 현대악기였거든요. 악기도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가고 있어요. 국악기가아닌 한국의 악기로 보는 시선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잠비나이 이일우)
2000년 이후 ‘전통음악의 세계’는 뒤틀렸다. 2004년 우리 음악에 새로운 트렌드를 만든 ‘바람곶’(원일 박순아 이아람 박우재 박재록)이 등장하면서다. 이들에게서 이어진 DNA는 K-뮤직(한국음악)의 확장과 팽창을 이끌었다. 2010년대에 접어들며 잠비나이 고래야가 등장했고, 이들은 다시 악단광칠 이날치 해파리로 진화했다. “변하지 않는 전통”을 소재로 ‘지금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다.
아무도 몰랐던 ‘가장 힙한 음악’을 하고 있는 이들을 한 자리에서 만났다. 무토(MUTO) 박우재, 잠비나이와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 악장으로 활동 중인 이일우, 해금연주가 천지윤, 컨템퍼러리 국악 싱어송라이터 상흠이다. 지금 이들은 ‘새로운 음악시대’를 연 주역으로, ‘2022 여우락 페스티벌’(23일까지, 국립극장) 무대에 오르고 있다.
올해로 13회를 맞은 ‘여우락 페스티벌’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우재를 필두로 다양한 음악가들이 모여 새로운 만남과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다. 올해의 키워드는 ‘확장, 증폭, 팽창’이다.
“음악가 본연이 가진 창작의 고통에서 응축된 에너지가 출발한다고 생각해요. 진주처럼 빛나는 에너지를 가진 음악가들이 모여 자기 안의 것을 발현하려는 욕구가 점점 커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박우재)
페스티벌에서 이들은 ‘또 하나의 세계’를 건넜다. 이일우는 록밴드 팎(PAKK)과 만나 ‘고요한 씻김’ 무대를 선보였다. 2010년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한 포스트 록밴드 잠비나이로 데뷔, 새로운 음악 세계를 구축해 왔음에도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일우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인 데다, 완벽하게 음악을 만드는 팎의 무대에 내가 된장을 칠하는 건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팎의 배려로 국악기를 잘 녹여내 자유롭게 색칠할 수 있는 무대가 됐어요.” 특히 이 무대에선 대중에게 ‘기타 연주자’로 더 유명했던 이일우의 주무기인 피리와 태평소 연주도 만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억울함을 씻을 수 있는 무대였어요.(웃음)”
천지윤과 상흠의 만남은 서로에게 시너지가 됐다. 두 사람은 이번에 처음 만나 무대를 꾸몄고, 음반 발매라는 결실도 맺었다. 창작 국악그룹 비빙 출신으로 우리 음악을 이끈 천지윤과 고래야, 인디밴드 킹스턴 루디스카 출신으로 전통음악에 관심을 가진 상흠의 만남은 낯설고 신선했다.
천지윤은 상흠에 대해 “너무도 극단에 있는 아티스트이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상흠과 만나 그는 ‘요즘 힙하다’는 망원동에도 가보고, 평소 만난 적이 없는 사람도 만났다. 모든 것이 “신선한 자극이고 경험”이었다.
“그동안 나와 비슷한 아바타 같은 예술가만 만나왔는데 그 범위를 완전히 뛰어넘은 다른 양식이었어요.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고, 추구하는 길이 다른 인연을 만나며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자아가 확장된 느낌이 들었어요.” (천지윤)
“전통음악이나 퓨전국악에 꾸준히 관심이 있었는데, 이젠 서양의 12음계보다 국악의 5음계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 더 재밌어요. (천지윤) 선생님에게 영감을 받아 스케치를 그리면 선생님이 선율을 얹어 곡이 완성돼요. 이렇게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와 발견의 연속이었어요.” (상흠)
음악의 경계는 무너졌고, 장르는 허물어졌다. 국악과 대중음악의 왕래도 워낙에 활발하다. 바야흐로 ‘협업의 시대’라고도 할 만하다. 모두가 ‘힙한 음악’이라고 말하는 K-뮤직의 탄생은 고민 없이 이뤄지지 않았다. 음악가들에게 국악기로 새로움을 시도하는 것이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이일우는 “국악기는 워낙 제한이 많은 악기라 팝 음악에 녹이는 것이 쉽지 않다”며 “국악기가 타당성을 갖는 선에서 확장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음악계에선 꾸준히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주법과 박자골, 선율의 변화는 기존의 국악에 완전히 새로운 색을 칠한다. 이일우는 “국악기라도 전통 선율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뭔가를 찾으면서 이 악기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고 있다”고 했다.
한 명의 연주자가 새로운 선율을 선보이고 시도하는 것은 “자신의 언어를 갖는 일”(천지윤)이다. 천지윤은 상흠과의 만남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장의 계기를 만났다. 실용음악을 하고 있는 상흠은 일찌감치 기타를 악기 삼아 “거문고와 가야금 소리를 표현”하고, “국악적 리듬감과 그루브를 표현하려는 시도”를 이어왔다.
“예상하지 못한 방식의 음악과 상상할 수 없는 선율을 만났어요. 그 선율 안에서 내야 하는 주법을 실험하고 발휘하면서 제 안의 체화가 일어나면 나의 언어와 도구를 확장하게 되는 과정을 만나게 되더라고요.” (천지윤)
박우재는 새로운 주법의 창시자다. 거문고를 활로 연주하는 주법을 트렌드로 만든 것이 박우재다. 그는 “사실 이 주법은 거문고라는 악기 본연의 소리가 아니”라며 “20년 전의 나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음악가들이 새로운 소리와 주법을 찾는 것은 화려한 옷을 입고 나만의 색을 보여주는 작업”이라며 “그것이 자신의 무기가 되고 남들과 달라질 수 있는 지점이 된다”고 했다.
전통음악을 향한 관심의 부재는 이들에게 큰 고민을 안겼다. 새로운 시도 역시 때때로 외면받았다. 천지윤은 “이쪽에선 실험적이고 진보적이라는 음악을 선보이지만, 일반 대중의 입장에선 너무 충격적이고, 혼란스럽게 느낀다는 것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가야금도 처음 봤는데, 이런 음악을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사람들의 기준에선 충격이었던 거예요. 이것이 굉장히 소수를 위한 문화가 아닌가 생각하게 됐고, 전통음악이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다양한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이를 가진 음악을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천지윤)
“많은 시도가 일어나고 있지만, 새로움만 좇는 아티스트가 되기 보단 새로움을 갖는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건 동시대성이라는 단어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동시대성은 아티스트 스스로 증명해야 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온전히 이해하고 바라볼 때 완성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시선으로 타장르와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어요.”(박우재)
새로운 음악의 정점에 선 이들은 ‘2022 여우락페스티벌’의 마지막 무대를 함께 한다. ‘여우락 익스텐션’이라고 이름 붙은 공연엔 14명의 음악가들이 무대에 오른다. 여우락 출연자들이 한 무대에 서는 것은 2014년 이후 처음이다. 공연에선 모두가 함께 하는 창작곡 세 곡을 연주하고, 7개 팀이 10분씩 개별 무대를 꾸민다.
첫 무대는 전통음악에 해석을 더한 ‘수연장지곡’이다. 경계 넘기에 주저함이 없었던 음악가들이 다시 ‘전통’으로 돌아간 무대를 선보인다는 것에서도 남다른 의미가 읽힌다.
박우재는 “여우락은 국악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는 페스티벌”이라며 “우리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새로운 음악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지만, 이 페스티벌을 통해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짚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열망의 근원엔 전통을 답습한 오랜 시간이 있었고, 그것을 연마한 시간이 응축돼있어요. 우리에겐 에센스가 국악인데, 너무 새로운 것만 보여주지 않았나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페스티벌 전체를 거쳐 본연의 전통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박우재) 대신 새로운 음악을 추구해온 사람들이 모인 만큼 “기존의 전통 그대로가 아닌 이들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또 무토가 작곡한 ‘콘스탄트’, 천지윤과 상흠이 작곡한 ‘번 더 브릿지(Burn The Bridge)’도 14명의 아티스트가 함께 꾸미는 신작 무대다. ‘콘스탄트’는 판소리 단가 ‘만고강산’을 기반으로 색다른 진화를 보여주는 곡이다. “불변에 대한 이야기”(박우재)를 담았다. ‘번 더 브릿지’는 “국악의 4분의 5박과 서양의 4분의 4박을 수학적으로 섞어 새롭게 확장한 음악”(상흠)이다. 천지윤은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때 다리를 불사른다”며 “그 정도의 각오를 가진 예술가들이 모인 만큼 개인의 기량이 발휘될 수 있는 곡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무대에 오르는 14명 중 전자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가는 세 명이나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날것의 자유분방한 소리를 내는 아날로그 악기가 전자음악이라는 틀에 갇힌 프로그램 안에 들어왔을 때 죽을 것인지 살아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이 작업을 통해 그것이 더 생동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확인했어요. 아날로그와 전자음악이 공존하는 지점에서도 재밌는 점들이 발견됐고요.”(박우재)
그 새로움이 ‘익스텐션’ 무대에서 발현된다. 23일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이 무대에 대해 이들은 “기존의 틀과 프레임을 탈출하는 비상구”(상흠)이자, “그간 응축된 음악을 발현하는 예술 용광로”(천지윤)라고 했다.
“‘여우락 익스텐션’은 멀티탭이에요. 우리의 에너지를 꽂아 연결되는 무대죠. 14개의 전구가 멀티탭으로 이어져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박우재)
‘이종간의 만남’은 “예상치 못한 충돌과 화학적 반응”(천지윤)을 끌어낸다. 여우락 페스티벌의 시도는 이들을 뒤따르는 후배에들에게 또 하나의 유산을 남기고 있다. 지난 13회를 거치는 동안 ‘여우락 페스티벌’ 역시 확장하고 진화했다.
이일우는 “1, 2회 무렵 잠비나이 섭외가 들어왔는데, 음악이 시끄럽다고 잘린 적이 있다”며 “이곳이 우리끼리 노는 페스티벌이 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다양성을 추구하며 발전하고 있고, 젊은 국악인들이 음악적 날개를 펼 수 있는 장이 되고 있다”고 봤다.
여우락에서 자유로운 시도와 실험이 가능했던 것은 음악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열린 관객’과 ‘국립극장의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다.
2회 연속 ‘여우락 페스티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박우재는 “다양한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한 관객들이 여우락의 새로움을 만든 기반이 됐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국립극장이 가진 탄탄한 시스템과 든든한 지원은 음악가들의 시도에 날개를 달았다.
“여우락은 마치 패션과 비슷해요. 여우락은 밀라노나 파리에서 열리는 패션쇼가 아니라 아티스트들이, 자기가 빛날 수 있도록 끼를 발산하는 ‘멧 갈라(Met Gala)’같은 느낌이에요. 여기에서 보여주는 공연은 한 아티스트가 돈을 들여 할 수 있는 수준의 공연이 아니에요.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극장에서 서포트한다는 것이 정말 놀라워요.” (박우재)
참여하는 음악가들 역시 “이런 무대가 앞으로 10년, 20년 후 음악인들의 길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봤다. 상흠은 “여우락은 국악과 대중음악이 요동치는 이 신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토양같은 곳”이라고 했다.
“여우락 무대가 국악의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렇기에 여우락의 모습이 복제되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또 다른 모습으로 확장해 새로움을 보여줄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박우재)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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