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꼼꼼한 분석'으로 방송작가 노동자 인정한 사상 첫 판결문
[서울행정법원 MBC 부당해고 판결문] "노동자도 방송작가만큼 재량 있어" 프리랜서 노동자 전반 적용될 듯…'포괄적 계약·세세한 지시·보수없이 일시키기'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무늬만 프리랜서들과 싸운 결과물로 나온 판결문들에서도 볼 수 없었던 문장들이 보인다. 초심 노동위원회가 간단히 부정했던 사실들을 재판부는 재심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해석했다.”
노동위원회에서 MBC '뉴스투데이' 해고 작가들을 대리했던 김유경 노무사(돌꽃노동법률사무소)는 지난 15일 공개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문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지난 14일 MBC가 자사 보도프로그램 '뉴스투데이' 방송작가 2명을 해고한 것이 부당하다고 선고했다. 방송작가를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한 사상 첫 판결이다. 판결문을 보면 법원은 그간 방송사들이 방송작가가 '프리랜서'라며 관행처럼 내세운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방송사가 작가들의 '재량'을 강조하고 사측 지휘·감독을 '방송업에서 불가피한 협업'이라고 밝혀온 주장을 적시하고 그 모순을 조목조목 짚었다.
1.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도 재량은 있다”
MBC는 줄곧 '두 방송작가가 재량껏 창작 업무를 하는 프리랜서'라고 주장했다. 특히 최초 뉴스 아이템에 대한 결정권이 방송작가에게 있었고 방송사는 협업했을 뿐이라고 했다. 데스크가 상세히 지시한 기록을 놓고는 '해당 방송작가가 작가로서 역할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중노위에 이어 MBC 측이 구체적이고 세세한 업무 지시를 했다고 밝히는 한편, 여느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도 '업무상 재량'을 가진다고 일침했다.
재판부는 “원고 방송사(MBC)는 참가인들(두 작가)이 뉴스 아이템을 선정함에 있어 매우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관여했다”고 밝혔다. “앞서 두 작가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데스크)가 참가인 김아무개(작가)에게 한 발언, 김씨가 작성한 인수인계 자료 등을 종합하면, MBC는 특정 정책, 집단, 사회적 이슈, 다른 언론사 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탕으로 뉴스 아이템 선정 기준을 사전에 정해두고 그에 따라 뉴스 아이템을 선정할 것을 작가들에게 지시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어 “제품 조립 등 기계·반복적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닌 이상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고 하여 업무에 관해 어떠한 재량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못 받았다. “예컨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임이 명백한 회사의 사원도 자신이 담당하는 업무분장과 관련하여 어떤 아이템을 선정하고, 어떠한 내용으로 보고서를 작성할지 등에 관하여 어느 정도 재량을 가진다”고 판시했다.
재판에서 두 작가를 소송 대리한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이를 두고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도 어느 정도 업무 재량이 있으며, 재량이 있다는 것만으로 노동자성을 부정해선 안 된다는 것을 재판부가 받아들인 것”이라며 “이 부분은 방송 비정규직뿐 아니라 전체 프리랜서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향적인 판단”이라고 풀이했다.
2. 특정 표현 사용 지시도 '노동자성 근거'로 채택
재판부는 MBC가 작가들에게 특정 단어 사용을 지시한 사실도 사측 지휘·감독을 드러낸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MBC 데스크는 “우리 회사는 (DMZ를) '비무장지대'로 하기로 했다”고 전하거나, 사내 권고에 따라 보도국이 '소환'을 '출석 요구', '박스'를 '상자'로 표현하라는 당부를 전했다. “보도국의 방침”이라며 '66번 확진자 A씨'를 '이태원 클럽 확진자 A씨'로 쓰도록 하기도 했다.
이는 앞서 중노위도 따로 언급하지 않은 대목이다. 김유경 노무사는 “초심에서부터 관련 자료는 제출했지만 지방노동위원회는 '방송 종사자는 방송심의 규정을 적용받는다'며 간단히 부정했다”며 “그러나 재판부는 중노위의 꼼꼼한 조사를 토대로 자료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3. “MBC, 포괄적 계약하고 보수없이 일시켜”
재판부는 MBC가 두 작가에게 계약에 없지만 방송제작에 필요한 다양한 일을 보수 없이 지시한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김 작가는 계약서에 따른 업무의 범위에 포섭될 여지가 전혀 없는 업무(파업 기간 동안 경제 관련 기사 작성, 직원 선발·면접 과정에 참여, 토크콘서트 참석 등)까지 수행했으면서도, MBC부터 아무런 보수를 지급받지 못하였다”고 짚었다. 이어 이아무개 작가가 기존 번역자가 8만원에 하던 업무를 2만원 받고 했으며, 기상캐스터 방송 멘트를 보수 없이 추가 작성했다고 했다.
재판부는 “결국 MBC는 이 사건 각 계약서 2조가 참가인들이 담당하는 업무내용을 '기타 상기업무와 관련하여 필요한 업무'라고 매우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을 기화로 별도의 보수를 지급하지 않은 채 참가인들에게 위와 같은 업무를 수행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참가인들의 업무 내용을 일방적으로 정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못 박았다.
4. “겸직 자체로 전속성 부정할 수 없어”
'방송작가의 가외 소득'은 흔히 방송사들의 '전가의 보도'로 통용돼왔다. 방송사들은 방송작가들이 생계를 위해 다른 곳에서 일한 것을 노동자성 '반증'으로 썼다. 그러나 재판부는 MBC 취업규칙을 들어 이 주장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MBC 취업규칙에 의하면 근로 제공의 계속성·전속성이 인정되는 원고 방송사 소속 근로자들 또한 무조건적으로 겸직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므로, 오로지 겸직 그 자체만을 이유로 참가인들의 근로 제공의 계속성·전속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며 “작가들의 겸직으로 인해 뉴스투데이 작가 업무 수행에 현저한 지장이 초래되었음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김 노무사는 “작가료가 너무 적어 많은 방송작가들이 생계 유지를 위한 일들을 한다. 방송사들은 이를 끈질기게 문제 삼는 한편, '방송사는 겸직이나 영리추구가 엄격히 금지돼있는 업종'이라고 주장해왔다”고 했다.
5. '안전배려 의무', “프리랜서라면 존재할 수 없는 조항”
재판부가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 근로계약을 부정하기 어려운 대목을 지적한 것도 '무늬만 프리랜서' 판단에서 이례적이다. MBC가 업무위임계약서에 “갑은 을에 대한 안전 배려의 의무를 다하여야 하며, 기타 을의 생명, 신체, 건강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다하여야 한다”고 규정한 조항이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MBC가 사용자, 작가들이 피용자임을 전제로 근로계약에 수반되는 신의칙상의 부수적 의무로서 작가들이 노무 제공하는 과정에서 생명, 신체, 건강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필요한 조치를 강구해야 할 MBC의 보호의무를 명문화한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MBC와 작가들 사이의 법률관계가 위임계약관계라면 존재할 수 없는 조항”이라며 “이는 작가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매우 유력한 사정”이라고 밝혔다.
6. “방송작가의 일, 위탁할 성격의 일 아냐” 화룡점정
이번 판결은 긴밀한 협업이 이뤄지는 방송제작 노동을 일러 '독립된 사업자에게 위탁할 만한 성격'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 재판부는 “MBC의 뉴스투데이 제작 과정에 비추면, 작가들이 한 업무는 프로그램 제작이라는 공동 목표를 위해 정규직 근로자들과 함께 유기 결합해 수행한 것”이라며 “일부만을 따로 떼 내어 독립된 사업자에게 위탁할 만한 성격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뿐만 아니라 작가들이 제작에 관여한 코너들은 그 내용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큰 뉴스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단순히 몇 차례의 작업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제작·협업 과정을 거쳐야(한다)”며 “단계마다 MBC의 기획 의도에 맞도록 수정·보완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그 과정에서 MBC의 개입·관여 정도는 업무 위탁의 결과물에 대한 사전적 요구 및 사후적 평가나 건의의 수준을 넘어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개입으로서 곧바로 작가들의 업무를 구속하였다”고 밝혔다.
윤 변호사는 이를 두고 “방송업에서 종사하는 이들이 대부분 방송사와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협업해왔다는 점에서, 다른 방송 비정규직들에 미칠 영향도 클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 노무사는 “이번 판결은 (작가들 노동 양태의) 형식이 아닌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중노위에서 조사한 자료를 토대로 꼼꼼하게 분석했다. 앞으로 방송 비정규직 노동자성 판단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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