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 사건에 '늦게 다니지 마'란 말, 2차 가해입니다
'왜 술을' 안타까움 가장한 2차 가해
"2차 가해는 성폭력 트라우마 높여"
이달 15일 인천 인하대 캠퍼스에서 1학년 학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학교 학생이 준강간치사 혐의 피의자로 구속됐다는 소식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학교라는 마땅히 안전해야 하는 장소에서 벌어진 성범죄와 사망이라는 점만으로도 충격을 줬지만, 사건이 알려진 직후부터 쏟아진 '2차 가해'로도 사회에 또 다른 파장을 안겼다.
유독 성범죄에서만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고 범죄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서 찾는 현상은 지금도 또 다른 가해라는 인식조차 없이 이뤄지고 있다.
안타까움 아니라 '비난'입니다
'인하대 사망 사건'에서도 피해자가 숨지기 직전까지 피의자와 함께 술을 마신 것으로 알려지자 일각에서는 명백한 범죄보다 여기에 더 주목했다. 한 종합편성채널에서는 사건의 원인 중 하나로 '캠퍼스 내 무분별한 음주문화'를 들기도 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으리라는 이야기였다.
허민숙 국회 입법조사관은 이런 반응을 "안타까움을 가장한 비난"이라고 꼬집었다. 피해자에 대한 직설적인 비난이 아니더라도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집에 일찍 돌아왔다면' 등 피해자의 행실에 주목하는 일은 결국 스스로 몸가짐을 조심하고 올바르게 처신하면 성범죄가 없었을 것이라는 논리로 이어진다는 것. 이런 피해자 책임론은 결국 성범죄를 개인의 문제로 보도록 하고 가해자의 책임을 지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박사는 18일 YTN 인터뷰에서 "피해자는 어떠한 귀책사유도 없다"면서 "친구 만나서 같이 시험을 끝낸 즐거운 마음에 술 먹는 게 절대로 나쁜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걸 악용하는 가해자가 나쁜 것"이라고 강조했다.
'딸을 밤늦게 못 돌아다니게 단속하겠다' '너도 술 조심하라' 등의 반응도 피해자 책임론의 또 다른 형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반응을 스스로는 전혀 또 다른 가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조심해'서 위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덜 만들라는 충고가 2차 가해가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허 조사관은 "사건의 원인이 피해자가 충분히 주의하지 않아서 일어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2차 가해"라고 지적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펴낸 '성폭력, 의심에서 지지로' 책자에서는 "피해자에게 '조심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피해자가 조심하지 않아서 피해를 겪은 것이라고 비난하거나 질책하는 말로 전달될 수 있다"라고 짚었다.
아무리 조심하고 주의한다고 해도 범죄가 사라질 수 없다. 김태경 서원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책 '용서하지 않을 권리'에서 "범죄를 저지를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라면서 "이 경우 누구나 운이 나쁘면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를 바라보는 적정한 시선과 태도는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했다. 지나치거나 불필요한 관심은 자칫 2차 가해가 되기 쉽다는 의미다.
성범죄보다 치명적인 2차 피해
"성폭력 피해는 결국 2차 피해가 더 지배적이다."
권인숙 전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 '울림' 소장·2015년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토론회
권 전 소장은 해당 토론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은 성폭력 피해 자체에서 파생되는 피해보다 주변 사람들의 성 통념으로 인한 피해가 지배적이라 말한다"라고 전했다. 성범죄에 의한 피해는 시간이 흐르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2차 가해는 다수로부터 지속해서 혹은 평생 이뤄지기 때문에 피해자의 설 자리를 좁힌다는 것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상담일지와 심층 면접 등을 통해 조사한 결과 2차 피해 경험이 높을수록 성폭력 트라우마가 심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성폭력에 대한 부정적, 낙인적 주변 반응은 트라우마에 영향을 주는 유의미한 변수였다.
2차 피해로 성범죄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도 이어진다. 지난해 상급자에게 성추행 피해 후 숨진 공군 부사관 고(故) 이예람 중사는 회유와 협박 등 2차 가해에 시달리다 '조직이 나를 버렸다'는 유서를 남긴 채 생을 마감했다. 비슷한 시기 성범죄 피해 조사를 받던 청주 중학생 2명의 사망 역시 2차 가해가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죽음 불과 한 달 전에는 강원의 한 고등학생이 선배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후 이를 고소했으나 주변으로부터 2차 피해에 시달린 끝에 2021년 4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인하대 중앙운영위원회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한 대응 전담팀(TF)은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에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TF는 홈페이지에 올린 입장문을 통해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어떠한 경우도 용납될 수 없다"면서 "강력한 법적 대응을 강구할 방침"이라고 했다. 또 "학생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고 사회의 왜곡된 성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교과 과정에 성평등과 성교육을 강화하겠다"라고도 밝혔다. "다시는 이런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고인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길임을 인지하기에" 내린 결정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성범죄 피해자에게 과연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2015년 '우리가 말하는 피해자란 없다' 토론회에서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장 도움이 된 사람(기관)의 도움 내용은 바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내 설명을 믿어 주었다'였다. '내 편에 섰고, 나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다’와 ‘나의 감정을 귀담아듣고 이해해 주었다'가 그 뒤를 이었다.
'피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려주고 도와주었다'라는 실질적인 도움보다 이런 정서적 지지가 도움이 됐다는 답변이 더욱 많았다. 권 전 소장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극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장의 신체적, 심리적 혼란에 대한 대처보다 신뢰나 지지, 도덕적 가치 평가를 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지지'의 힘이 더욱 센 셈이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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