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범모 "이건희컬렉션 통합관론, 기증 취지와 어긋나"
지난 2월 재임명 2기 체제 돌입
하반기 전국 번갈아 전시 예정
청와대 컬렉션엔 "말할 게 없다"
올여름 한국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미술품 컬렉션은 두 꾸러미로 대별된다. 삼성가가 나라에 기증한 이건희 컬렉션과 지난 5월 대통령실 용산 이전으로 주인이 비게 된 청와대의 컬렉션이다.
이들의 운명을 놓고 여러 물음이 미술계 안팎에서 쏟아진다. 이건희 컬렉션은 어떤 시설에서 보관될까? 청와대 미술품은 앞으로 어디서 관리하고 전시할 것인가?
현재 이런 물음들은 답변을 종잡기 어렵다. <한겨레>는 이런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미술판에 알려진 윤범모(71)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난 15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그는 작심한 듯 여러 물음에 답했지만, 답변에는 명확함과 모호함이 뒤섞여 있었다. 핵심을 요약하면 이렇다.
“미술관을 많이 만들수록 좋지만, 이건희 컬렉션은 별개 문제입니다. 삼성가가 국립미술관과 국립박물관에 각각 나눠 기증해준 컬렉션을 다시 떼어서 합친 통합관 혹은 다른 근대미술관을 만드는 건 기증자 뜻과 안 맞습니다. 기증 작품들을 우리 미술관에서 연구하고 활용하는 게 저의 예우이고 임무입니다.”
“올 하반기부터 이건희 컬렉션의 전국화가 시작됩니다. 8월부터 서울과 영호남에 걸친 다섯개 미술관 전시장에서 이중섭·피카소 작품 등 이건희 컬렉션의 다채로운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덕수궁관은 사실상 국립근대미술관입니다. 옆에 있는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일부 공간을 우리 미술관이 위탁 운영하며 근대미술품 전시공간으로 활용하면 덕수궁관은 더욱 훌륭한 근대미술관이 될 것입니다.”
“청와대 컬렉션은 나도 잘 모릅니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도해서 조사하는 중이고 미술관의 공식 업무 라인이 아닙니다.”
한국근현대미술사 연구의 권위자인 윤씨는 2019년 2월 20대 관장으로 취임한 뒤 3년 임기를 마치고 공모를 거쳐 지난 2월 21대 관장으로 재임명돼 다시 3년 임기를 시작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임명돼 지난해 이건희 컬렉션의 근현대미술품 1488점의 기증 과정을 총괄하고, 관련 명작 전시회와 지역 순회전 준비를 진두지휘했다. 윤석열 정부 아래서도 2025년까지 관장으로 재직하며 이건희 컬렉션의 관리와 활용을 지속적으로 맡게 된다. 국가미술관 수장이기에 청와대 컬렉션 관리와 전시도 어떤 경로와 방식으로든 관여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되는 인사다. 하지만 이날 인터뷰에서 윤 관장은 대부분의 내용을 이건희 컬렉션의 관리와 활용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우고 청와대 컬렉션에 대한 언급은 극력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그는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이 국민들의 미술 인식을 획기적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미술관의 업무와 위상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전시가 준 영향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고 봅니다. 평생 미술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던 이들이 딸아이 이름처럼 입에 미술과 전시, 컬렉션을 올리게 됐잖아요. 미술관이 지난해 7월부터 지난 3월까지 하고 끝내려던 서울관의 기증 명작전을 두차례나 연기하고 코로나로 예약제를 현장 발권제로 푼 것도 현장에서 제발 전시를 보게 해달라는, 아우성에 가까운 시민들의 민원이 폭주했기 때문입니다. 미술관도 한해 새 작품 조사등록 건수가 평균 200점가량이었는데, 지난해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이후 잇따른 다른 기증 건까지 합쳐 10배 이상인 2000점으로 늘었어요.”
윤 관장은 내년에 1488점에 이르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 작품 전체에 대한 도록을 출간할 예정이라면서 그 전까지 작품들의 재료, 제작 연대 등의 주요 이력 조사를 끝내기 위해 총력을 다하는 중이라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새로운 사실이 여러 건 발견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비화도 들려줬다.
“원래 지역 미술관에는 기증 계획이 없었어요. 우리 미술관과 막판에 이중섭·박수근 기증작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삼성가 쪽 방침이 바뀐 겁니다. 국립미술관만 주려니 서귀포 이중섭미술관과 양구 박수근미술관이 마음에 걸린 거죠.”
지역 미술관에 대표작들을 기증하고 배려하는 게 좋겠다는 명분을 세웠고, 그러다 보니 화가 이인성(1912~1950)의 고향인 대구, 남도화단의 본산인 광주 등이 거명되면서 다섯 군데 지방 미술관에 작품을 주게 됐다는 전언이었다. 그는 “(삼성가의)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이 다섯 군데 불교 사찰에도 석탑, 석등 등의 희귀 석물을 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관심의 초점으로 부상한 청와대 컬렉션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닫았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컬렉션 현황을 조사하는 티에프(TF)가 결성돼 활동 중인 것으로 압니다. 미술관 학예사 여러명이 앞으로 예상되는 컬렉션 전시와 관련해 티에프의 자문에 응하며 준비 작업을 돕고 있는 정도이고 구체적 상황을 보고하는 체계가 아니기에 현재 아는 것이 없다고 봐도 됩니다.” 윤석열 정부가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 따로 건립한다고 밝힌 미술품 수장고에 대해서는 어떤 협의도 없었다고 윤 관장은 덧붙였다.
윤 관장은 2019~2021년 1기 체제에서는 학예연구 기능의 강화와 서예, 건축 등 소외 장르의 전시 기획 등으로 내실을 기했다면, 새로 시작하는 2기 체제에서는 글로벌 한류 미술의 정착 등 대외 활동과 내부 소통 강화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했다. 오는 9월 미국 엘에이카운티 미술관(LACMA)에서 사상 처음 열리는 한국 근현대미술 소개 특별전과 오는 11월 미국 동부에서 열리는 한국미술 주간 행사는 그 서막을 여는 의미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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