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이 무너지는 시기, 균형을 잡는 게 애널리스트의 역할"
[스페셜 리포트]
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97년 외환 위기, 2008년 금융 위기를 예견한 애널리스트였다.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늘 경고등을 먼저 켰다. 그는 ‘애널리스트의 사관학교’로 불렸던 대우증권 리서치센터의 기초를 설계했고 동시에 1990년대 초반 한국 리서치센터의 역사를 증언해 줄 수 있는 적임자이기도 하다.
‘다독가’로 정평이 나 있는 홍성국 의원은 현대의 애널리스트들을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에 비교했다. 담론을 통해 학문을 꽃피웠던 제자백가처럼 정보를 끊임없이 생성하는 것이 애널리스트의 주 업무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시장이 혼란스러울수록 애널리스트의 ‘입’에 더 많은 시선이 쏠리기 마련이다.
-국회에 입성한 지 2년이 됐습니다. 처음 정치권에 들어갈 때 뜻했던 바를 어느 정도 이루셨나요.
“대선과 지방선거가 연이어 치러져 선거에 집중하는 시기가 길었어요. 하지만 제 지역구인 세종시에 국회 분원을 설치하는 법률 개정안을 처리한 것은 큰 소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동여의도(증권사)에서 서여의도(국회)로 입성한 대표적 인물인데 정치권에 들어오니 그간 보지 못했던 한국 증권가의 특징이 보이나요.
“증권업은 먼 미래보다 당장의 손익을 바라보기 때문에 단기적 시각이 주류를 이뤄요.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의 열풍이 불고 있기는 하지만 그간 공공성에는 다소 소홀했다는 특징도 있죠.
저는 증권인 출신으로 국회에 입성했기 때문에 금융의 시각을 국회에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국회는 증권가의 많은 아이디어를 가져와야 하죠. 반대로 증권가는 국회가 추진하는 공적인 제도와 총체적 사회 현상을 반영해야 해요. 서로 ‘융합’해야 하죠.”
-대표적인 1세대 애널리스트잖아요. 한국 리서치센터의 초창기 모습이 궁금합니다.
“1990년대 이전에는 증권사들이 ‘투자분석부’를 운영했어요. 한국은행이나 정부 기관의 자료를 참고해 보고서를 쓰곤 했죠. 회의 때 살펴볼 리서치 자료를 몇 백 부씩 인쇄해 일일이 분철하는 게 ‘큰일’이었어요.
당시 대우경제연구소를 비롯해 동서증권·대신증권이 ‘경제연구소’를 운영했지만 주식 전망을 전문적으로 하는 곳은 별로 없었어요. 대우경제연구소는 대우그룹을 서포트하기 위해 산업조사실이나 기업분석실을 따로 두고 있었죠. 이마저도 없는 증권사들은 열댓 명의 직원을 두고 ‘투자분석부’를 마련한 것이 전부였죠.
그러다가 1992년 1월 자본 시장이 외국인에게 개방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어요. 외국인들의 주문을 받으려면 리서치가 필요했고 펀드매니저들이 애널리스트들에게 요구하는 바가 늘어났어요. 각 증권사마다 70~80여 명으로 리서치센터의 규모를 확 늘렸어요. 여기에 2000년대부터 언론사들이 애널리스트 평가를 시작하면서 ‘무한 경쟁 시대’의 막이 올랐죠.”
-의원님이 몸담았던 대우증권은 ‘애널리스트 명가’로 불렸습니다. 당시 대우증권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대우증권은 거시경제·채권·파생상품·회사채·신용분석·자산배분·해외시장 등 7가지를 운영해 매크로를 다 다뤘어요. 모든 섹터에 애널리스트와 리서치 어시스턴트(RA)를 두고 전부 커버했고 글로벌 리서치를 번역하는 것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어요.
저는 늘 증권사에는 연구·개발(R&D) 인력이 최소 3%는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시 대우증권이 약 3400명의 직원 중 120여 명의 R&D 인력이었으니 3%를 넘은 거죠.”
-투자분석부 부장, 리서치센터장을 거쳐 사장에 오르기까지 오랜 시간 대우증권에 몸담았습니다. 후배 애널리스트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었나요.
“첫째는 ‘공부’예요. 저는 애널리스트들에게 주식 말고 다른 분야의 책을 써 보라고 늘 얘기해요. 주식을 넘어 사회 현상 등 큰 그림을 보는 이른바 ‘통섭’의 중요성을 알기 위해서죠.
둘째는 협업이에요. 시계의 뒤를 열어 보면 모든 나사가 연결돼 있어요. 나사 하나가 빠지면 시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협업은 조직에선 매우 중요해요. 애널리스트들이 데이터나 차트를 공유하면서 토론해야 더 좋은 결과물이 나와요.
마지막은 세일즈 능력이에요. 대우증권 시절 리서치 자료를 마케팅화하는 것을 중시했어요. 러서치는 금융회사에 ‘공기’와 같아요. 공기가 없으면 죽는 것처럼 리서치 없이 금융회사는 영업할 수 없어요.”
-현직에 있을 때와 비교해 2022년 애널리스트의 역할은 어떻게 변했나요.
“역할이 크게 줄었어요. 과거에는 리서치센터가 법인영업은 물론 투자은행(IB) 부문까지 맡고 회사의 경영 전략까지 조언할 수 있었죠. 금융이나 은행 섹터 담당자들은 금리 흐름 등을 파악해 경영진에게 경고해 주기도 했어요. 센터장의 역할도 지금보다 컸죠.
지금은 비용 때문인지 리서치센터 인원이 과거보다 30%는 줄어든 것 같아요. 애널리스트들 또한 리서치가 워낙 힘들기도 하고 데이터의 의미를 찾는 데 3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이탈이 많은 것 같아요.”
-애널리스트들의 조직 이탈 현상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한 분야에서 10년은 해야만 전문가가 될 수 있어요. 반도체 섹터를 맡았다고 반도체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중국 대수출 비율이나 경제성장률, 삼성전자라는 기업에 대한 공부 등을 두루 해야 하죠. 지금은 이른 성공을 위해 빠른 이직이나 전직이 활성화된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시장을 분석하기 위해 어떤 애널리스트의 보고서를 참조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애널리스트는 ‘최고의 전문가’예요. 국회에 와보니 그 어떤 전문가들보다 애널리스트를 초청한 세미나의 평가가 제일 좋아요. 그 시장에 대해 가장 잘 알기 때문이죠. 모간스탠리를 비롯한 글로벌 투자은행의 분석이나 세계 경제 동향도 애널리스트들 만큼 잘 아는 사람들이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이 리서치센터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글로벌 경기가 침체될 것이란 전망이 나옵니다. 혼란스러운 시장에서 애널리스트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기존 질서가 깨지고 새로운 질서로 바뀌는 시기입니다. 일단 애널리스트들은 본인이 그간 시장을 바라봤던 ‘틀’이 무너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우선 매크로가 바뀌고 있고 사회가 변화할 것이고 그러면 기업도 전략을 바꿔야 하죠.
화장품 섹터를 예로 들어 볼게요. 한·중 관계가 우려가 따르는 시기예요. 화장품 섹터 담당자는 중국 수출을 고려해 수익을 보수적으로 잡고 추이를 봐야 하죠. 그리고 화장품 회사들이 동남아 시장을 노릴지, 유럽으로 갈지 예측해야 해요. LG생활건강의 ‘후’라는 브랜드가 중국에서 잘나갔는데 그게 유럽에도 통할까, 브랜드 이미지나 마케팅을 이 회사가 재고할 생각을 갖고 있는지 등을 애널리스트가 판단해야 해요.
정보의 홍수에 빠져 죽을 것이냐, 홍수에서 요트를 탈 것이냐…. 애널리스트들이 균형을 잡아야 할 시기가 온 거예요.”
이명지 기자 mj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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