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규제 새판짜기에 기대와 우려 교차..사모펀드 사태 지적도
[서울=뉴시스] 정옥주 기자 = 금융당국이 '빅 블러(Big blur)' 시대에 걸맞게 기존 낡은 제도와 규제를 대거 정비하는 '새 판짜기'에 돌입하겠다고 밝히자, 금융권 안팎에서는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전날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제1차 금융규제혁신회의'에서 '디지털화, 빅블러 시대에 대응한 금융규제혁신 추진방향'을 통해 4대 분야, 9개 주요과제, 36개 추진과제를 선정해 검토·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금산분리 규제 완화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금융회사의 IT·플랫폼 관련 영업과 신기술 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업무범위와 자회사 투자 제한을 개선하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검토한다는 계획이다.
금산분리란 은행 등 금융 자본과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산업 자본이 서로의 업종을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원칙을 말한다. 이 원칙에 따라 기업이 은행의 주식을 일정 한도 이상 보유하거나, 은행 등 금융회사가 기업의 주식을 일정 한도 이상 보유하는 것이 금지된다. 현재 금융지주는 비금융회사 주식을 5% 이상 보유할 수 없고, 은행과 보험사들은 원칙적으로 다른 회사 지분에 15% 이상 출자가 불가능하다.
예컨데 현재 A은행은 다 UX·UI(사용자환경·경험) 디자인 회사, 부동산 등 생활서비스 업체 인수를 희망하고 있지만, 은행법상 비금융 회사에는 15% 이내 지분투자만 가능하다는 규제에 가로막혀 사업 추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B은행 역시 음식배달중개 플랫폼 비즈니스 영위를 희망하고 있지만 부수업무로 인정받지 못해 규제 샌드박스를 적용해 임시 운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과거 아날로그 시대에 만들어진 기존 금융규제들이 디지털 현실에 적합하게 기능하지 못하고 있어, 현실에 맞게 새로운 규제체계를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이번 규제 개선을 통해 금융회사의 업무범위가 확대되고, 업종제한 없이 자기자본 1% 이내 투자 허용하는 방안이 현실화되면 금융사들은 음식배달, 통신, 유통, 가상자산 시장 등에 진출이 가능해진다. 현행 은행법 감독 규정상 은행의 자회사로 둘 수 있는 업종은 은행업, 금융투자업, 보험업, 상호저축은행업무, 여신금융업 등 15개로 제한돼 있다. 그러나 제도가 개선될 경우, 예컨데 자기자본이 20조원인 은행은 2000억원까지 15개 업종에 해당되지 않는 비금융 자회사에 투자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금융당국은 가상자산, 조각투자 등 디지털 신산업의 책임있는 성장을 유도하기 위해 디지털자산 기본법을 제정하는 등 균형 잡힌 규율체계를 정비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가상자산의 경우 국내 가상자산 발행(ICO)을 허용한다는 방침이다. 현재는 국내 ICO금지에 따라 해외에서만 ICO 진행되고 있다. 또 은행 등 금융사들이 가상자산 관련 업무를 영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비금융 자회사 허용, 자회사 기준 개선, 부수업무 확대 등은 은행들이 그동안 은행법의 틀에 막혀서 하지 못했던 것들로, 규제 완화가 본격적으로 다뤄지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 타 산업 진출의 길을 열어주면 은행 뿐 아니라 금융회사들이 탄탄한 자본을 바탕으로 외연확장에 나서게 되면서 은행업의 경쟁력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전했다.
보험업계 관계자도 "그간 금산분리 규제로 인해 보험 쪽에서는 새로운 사업을 시도하고 싶어도 막혀 있는 상태였다"며 "보험업 뿐 아니라 연관된 타 영역으로 서비스를 확대하면 시너지를 높일 수 있고 고객 유입도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현실에 맞게 규제를 재정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지나친 규제 완화는 '시기상조'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금융권을 강타한 파생결합펀드(DLF), 라임자산운용 사태 등 대형 금융사고들이 과거 설익은 금융규제 완화와 부실한 금융감독 체계에서 비롯된 만큼, 제도적 장치를 제대로 구축하지 않고 규제부터 완화하고 나서는 것은 보다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의 경우 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 ICO를 규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가상자산에 대한 규제 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다"며 "큰 틀을 만들어 놓지 않은 상태에서 ICO를 허용하고, 또 금융사들에 가상자산업을 허용할 경우 추후 사고 발생 등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도 "가상자산을 제도권 내에서 관리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은행들에 당장 허용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며 "은행들에 기본적인 신뢰 이슈가 불거질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은행에 (가상자산업을)허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보여진다"고 말했다.
아울러 금산분리 규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중간금융지주회사 도입 등 산업자본의 금융 진출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가능성에 대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서지용 교수는 "금융사의 산업자본에 대한 투자에 대한 제한을 풀어주는 것은 금융혁신 차원에서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며 "다만 금산분리 규제가 대기업의 은행 사금고화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된 만큼, 이에 대한 추가 장치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산업자본의 금융 진출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본다"고 말했다.
성태윤 교수도 "개별 금융기관 등이 가지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금산분리 규제를 일부 조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된다"며 "하지만 대중의 예금을 수취하는 은행의 경우에 은산분리는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정순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빅블러 현상 등 금융산업의 변화 및 향후 전망, 제조와 판매 등 금융기능간 차이 등을 고려할 때 금융회사의 자회사 투자 및 업무범위 규제에 수정이 필요한 단계에 왔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금산분리 취지의 제도 중 산업자본의 은행 주식 소유 규제에 대해서는 "빅테크의 은행업 진출에 따른 리스크 등을 고려해 장기과제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에 대해 금융위 측은 금산분리 완화 자체가 그 목적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했다. 산업자본의 금융업 확장보다는 금융업의 혁신산업 진출에 주력하겠다는 의미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전날 금융규제혁신회의를 마친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금융규제 혁신은 금산분리 완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라며 "빅테크, 가상자산 등 새로운 산업이 나오고 있는 만큼 우리 금융회사, 빅테크들을 위해 관련 규제를 고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channa224@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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