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인하대 학생들의 '추모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나[플랫브리핑]
지난 18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학교 캠퍼스의 한 단과대학 건물 앞으로 흰색 국화를 든 학생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3층 창문 옆, 미처 떼지 못한 노란색 ‘폴리스라인’ 스티커만 없었다면 학생들이 웃고 떠들고 공부하는 평범한 건물이었다.
지난 15일 이곳에선 학내 성폭력 사망사건이 발생했다. 이 학교 1학년 A씨(20)는 같은 학교 학생 B씨(20)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이 건물 3층에서 추락해 숨졌다. 사망 소식을 접한 학생들이 건물 출입구에 조화와 간식거리, 포스트잇을 하나둘 놓고 가기 시작하면서 조촐한 추모공간이 마련됐다.
“주말 사이 비가 내리면서 꽃과 포스트잇이 젖을까 봐 총학에서 쓰던 텐트랑 테이블을 가져다 놓았어요. 유가족들이 보시면 마음이 안 좋을 수 있으니까요. 유가족들이 장례 절차가 끝난 후엔 추모 공간을 철수하길 바라셔서, 오늘(18일) 오후 6시까지만 운영하기로 했어요.”
이날 추모 공간 앞에서 만난 권수현 인하대 총학생회 비대위원장 수석국장 직무대행(21)의 설명이다. 비대위원장이 공석이라 권 수석국장 직무대행 1명이 비대위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검은색 양복을 입은 그는 이날도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철거를 1시간 앞둔 시간까지도 추모 공간을 찾는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캠퍼스 바깥의 소란이 무색할 만큼, 학생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 피해자를 애도했다. ‘그곳에선 아프지 않길 바라요.’ ‘죄지은 사람 꼭 벌 받게 할게요.’ ‘아름다운 교정에서 다시 만나자.’ 추모 공간 한쪽에 붙은 포스트잇에는 말로 전하지 못한 진심들이 빼곡했다.
신다인씨(가명·21)는 조문을 마친 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에브리타임과 신문을 보고 소식을 접했는데 너무 놀랐어요. 처음엔 피해자가 몇 살인지도 몰라서 더 무서웠어요. 저하고 가까운 사람일까 봐요. 마음이 무거워서 사실 여기도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홍다연씨(22)는 “피해 학생과 안면은 없었지만 학교에서 지나치며 만났을 수도 있지 않나. 나나 내 친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일부 학생들은 포스트잇을 읽다 눈물을 훔쳤다.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인하대 재학생들이 사용하는 익명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 피해 학생에 대한 ‘2차 가해’성 글이 다수 올라왔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이날 추모 공간을 찾은 학생 다수는 “그런 글은 극히 일부”라고 전했다.
이승우씨(23)는 “중앙동아리 카톡방에 추모 공간 주소가 올라와서 들렀다”며 “(2차 가해 게시글 논란 후) 처음엔 ‘남녀 갈등’ 프레임으로 비화할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지금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여론이 대부분”고 했다. 홍씨 역시 “그런 글(2차가해성 게시글)은 극히 일부고, 올라오더라도 ‘지금은 싸우기보다 피해자를 추모할 때’라는 댓글이 더 많이 달린다”고 전했다.
인하대 성폭력 사망 사건이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15일 저녁이다. 이 사건은 연합뉴스가 <인하대서 여성 옷 벗은 채 피흘리고 쓰러져...>라는 헤드라인으로 처음 보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경향신문을 포함한 다수 언론사도 이와 비슷한 제목으로 이 사건을 보도했다.
2018년 여성가족부와 한국기자협회가 발표한‘성폭력·성희롱 사건 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은 “피해자의 피해 상태를 자세하게 보도하거나 피해자에 대한 편견이 반영된 보도를 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지난 18일 오후 3시 기준 네이버에서 검색된 인하대 학생 사망 사건 관련 뉴스를 전수 분석한 결과 선정적 표현을 사용한 언론사는 68곳, 성차별적 표현을 사용한 곳은 42곳에 달했다. 경향신문을 비롯해 비판이 제기된 후 제목을 수정한 언론사들은 제외한 수치다.
이러한 헤드라인은 피해자 신상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즉각적인 2차 가해로 이어졌다. 권 국장은 “처음 언론 보도에 ‘나체’ ‘알몸’ 등의 키워드가 포함되면서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피해자가 아닌) 여성 나체 사진들이 계속 올라왔다. 피해자와 가해자 관계에 관한 확인되지 않는 정보들도 떠돌았다”고 했다.
📌관련기사 : 또다시…성폭력 피해자 공격하는 사람들
정리되지 않은 언론 보도에 학생들은 우왕좌왕했다. 2차 가해에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당국의 수사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목소리가 뒤엉켜 오갔다. 권 국장은 “애도 분위기를 잡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판단해 ‘눈물을 삼키며, 미어지는 가슴을 안고’라는 제목의 글을 16일 인하대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하지만 이 입장문은 피의자 B씨의 책임 문제나 대응 방안 등에 대한 언급이 없어 감성에만 호소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권 국장은 “유족 중에는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사망 경위를 제대로 모르는 분들도 계셨다. 그런 상황에서 ‘가해자’라는 표현을 쓰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면서도 “사고사가 아닌 사건사인 만큼 향후 대응에 관한 내용도 포함됐어야 했는데 그러한 수요를 충족하지 못해 죄송하다”라고 했다. 또 “가해자에 대한 최고 수준의 징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총학생회의 명확한 입장”이라며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난만큼 유족의 뜻을 최우선으로 놓고 향후 대응 방침을 결정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추모공간이 철수되는 18일에는 여성 중심 커뮤니티에서 보낸 근조 화환 100여개가 반송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남성 교직원들이 유족 뜻과 상관없이 화환을 철거했고 이 과정에서 화환을 보낸 이들을 조롱했다는 것이 논란의 골자였다. 화환에는 “끝까지 지켜보고 연대하겠습니다”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말고 범죄를 직시하라” 등의 문구가 달려있었다.
이에 대해 인하대 홍보팀 관계자는 “화환을 보낸 분들이 소속이나 성함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해 유족들 뜻에 따라 반송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권 국장도 “유족들은 2차 가해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계신다. 피해자가 계속해서 언론에 언급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며 “여성 커뮤니티에서 화환을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은 의도라 하더라도 남초 커뮤니티에 오르내릴 수 있고, 그게 또 언론보도로 재확산되면서 혐오 표현의 ‘트리거’(도화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추모공간 철수나 화환 반송은 이를 차단하기 위한 선제 조치였다는 취지다.
인천 미추홀경찰서는 지난 17일 B씨를 준강간치사 혐의로 구속해 자세한 범행 경위를 수사하고 있다. B씨는 술에 취한 A씨를 상대로 성폭행을 시도했다는 점은 인정했으나, 살인 의도를 갖고 밀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B씨가 A씨를 고의로 밀쳤는지 여부를 비롯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 중”이라고 밝혔다.
경찰 수사와는 별개로 인하대도 자체 대응에 나섰다. 인하대 교학부총장을 위원장으로 한 ‘성폭행 사망사건 대책위원회’는 18일 입장문을 통해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대책위가 제시한 대책에는 가해자에 대한 징계절차 개시, 유가족 및 학생 심리상담 지원, 전교생을 상대로 연 1회 실시하는 성폭력 관련 특별교육을 2회 이상으로 늘리는 방안 등이 포함됐다.
대책위는 특히 2차 가해에 대한 강력한 법적 대응을 시사했다. 홍보팀 관계자는 “내부적으로도 2차 가해가 매우 심각하다고 보고 있다. 인터넷에 떠도는 게시글 일부는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학생 공동대응 TF’도 자체적인 2차 가해 제보 채널을 만들어 운영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언론의 초기 보도를 2차 가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목했다. 피해자 성별을 부각하거나 피해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불필요한 호기심을 자극했다는 것이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 소장은 “최초 보도 당시 헤드라인들은 피해자에 대한 모욕과 공격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언론사들이 직접 만든 성폭력 보도 가이드라인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는 사이 학교내 성범죄의 심각성, 뒤늦게 쏟아내는 대책들의 실효성 등 본질적 문제들은 가려지고 있다. 피해자는 물론 구속된 피의자 B씨에 대한 ‘신상털기’식 게시물도 SNS(소셜네트워크)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권김 소장은 “경찰 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에 대한 추모 여론이 조성되어야 할 사건 초기부터 가해자에 대한 공분을 자아내는 보도가 불필요하게 많아지는 점도 우려스럽다”고 했다. 이어 “가해자의 신상 공개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의 보도 역시 이 사건을 ‘콘텐츠’로 소비하긴 마찬가지”라며 “이런 상황에서 성폭력 보도에 대한 언론의 반성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한상희 언론인권센터 사무차장은 “커뮤니티에서 2차 가해 게시글이 올라왔다고 해도 공적 책무를 가진 언론이 이를 받아쓸 이유는 전혀 없다. 이러한 보도 자체가 대중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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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지 기자 sharpsim@khan.kr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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