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서해 보고서 삭제' 의혹, '남북회담 회의록' 판례로 본 쟁점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서해 공무원 피살 첩보보고서 삭제 지시’ 의혹은 ‘기록 삭제’ 여부가 논란이라는 점에서 노무현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무단 파기’ 사건과 닮았다. 박 전 원장의 보고서 삭제 지시가 사실인지, 해당 보고서가 삭제해선 안될 기록이었는지가 쟁점이다.
국정원이 지난 6일 박지원 전 원장을 검찰에 고발하면서 적용한 혐의인 전자공용기록등손상죄는 공무소에서 사용하는 전자기록을 손상하거나 은닉해 효용을 해하는 범죄이다. 이에 대한 대법원 판례는 2020년 12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무단 파기’ 사건 판결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의 백종천 전 외교안보실장과 조명균 전 안보비서관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초안이 담긴 문서관리카드를 ‘e지원’(청와대 업무관리시스템)에서 삭제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에선 회의록 초안의 보존 필요성이 쟁점이 됐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은 ‘회의록 완성본이 나오면 초안은 당연히 삭제돼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1·2심과 달리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건을 유죄 취지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공무소에서 사용하는 전자기록은 공문서의 효력이 생기기 이전 문서도 포함되기에 미완성인 문서라도 죄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고 했다. 초안은 후속 업무처리의 근거가 되는 문서이기 때문에 삭제가 위법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지난 2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대전지법에서 열리는 ‘월성 원전 1호기 문건 삭제’ 의혹 재판에서도 비슷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 3명은 2019년 12월 감사원의 자료제출 요구 전날 사무실에 침입해 월성 원전 관련 전자파일 530건을 삭제한 혐의로 기소됐다. 산업부 공용 서버가 아닌 개인의 업무용 컴퓨터에서 삭제됐는데, 이 파일들이 보존해야 할 기록이었는지가 쟁점이다. 피고인들은 ‘작성 중인 문서는 특별한 관리 체계가 없어 후임자에게 필요 없는 중간 버전의 문서를 삭제했다’고 주장하고, 검찰은 ‘감사원 감사에선 업무 과정에서 생성된 모든 의사결정 자료가 필요하다’고 반박한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19일 통화에서 “전자기록 시스템이 중간 기록을 보존하도록 관리될 경우 삭제 행위가 공용전자기록등손상죄에 해당할 소지가 크다”면서 “삭제 행위의 동기, 목적, 경위 등 전후맥락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공무원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중간 버전의 문서는 삭제해도 되겠지만 어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삭제했다면 범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박 전 원장이 삭제한 혐의가 있는 기록이 국정원이 자체 생산한 보고서인지, 군이 생산한 SI(특수정보)인지도 확인하고 있다. 박 전 원장은 최근 수차례 인터뷰에서 “국정원 서버에서 자료를 삭제해도 첩보 생산처(국방부) 서버의 원본은 남는다”라며 “제가 그런 바보짓(삭제 지시)을 하겠느냐”고 혐의를 부인했다. 보고서 삭제 지시 자체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국정원 주장대로 박 전 원장의 삭제 지시가 사실이라면, 같은 내용의 원본이 있는데 사본을 삭제한 행위가 전자기록의 효용을 해쳤다고 볼 수 있는지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월성 원전’ 재판에서도 피고인들은 ‘컴퓨터에서 삭제된 전자파일 530개 전부가 산업부 내부 웹디스크(공용 서버 저장공간)에 압축된 상태로 존재한다’고 주장해 재판부가 사실관계를 확인 중이다.
대법원 판례를 보면 원본 존재 여부는 공용전자기록등손상죄 성립에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백 전 실장과 조 전 비서관이 삭제한 회의록 초안은 국정원이 회의 녹음파일을 토대로 작성한 회의록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회의록 원본이 국정원에 남아 있었지만 이들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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