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찬성' 돌아선 미 환경운동가들..변심인가 고육책인가
미국·유럽서 커지는 원전 찬성 여론
러시아 전쟁발 '에너지 안보' 우려에
신재생 외치던 정치인들 "원전 필수"
시민들도 탄소배출 없이 "가동 연장"
'원전이 대안?' 시각엔 여전히 회의적
사고 위험성·핵폐기물 처리 난제
우라늄 주수입국은 러와 주변국
수십년 폐지 흐름에 인력도 퇴조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비영리단체 ‘원자력을 지지하는 엄마들’(mothers for nuclear)은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대규모 원자력발전소 ‘디아블로 캐니언’의 가동 중단을 막아달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 단체의 설립자인 8살, 5살 두 자녀의 어머니 크리스틴 제이츠는 “우리 아이들을 대기오염과 기후변화로부터 지키기 위해 원자력 에너지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4일 단체 회원들은 존 레어드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민주당)을 만나 2025년 중단 예정인 이 원전을 계속 가동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캘리포니아의 에너지 수요를 볼 때 디아블로 원전을 가동하는 게 명백한 대안”이라며 “자녀의 미래를 위해 엄마들이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친환경 정책 등 진보적 가치를 중시하는 민주당의 대표적 ‘아성’인 캘리포니아주는 지난 수십년 동안 석탄 등 화력발전뿐만 아니라 끔찍한 사고 위험을 안고 있는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정책을 펴왔다. 원전 강국인 프랑스 정도를 제외한 주요 선진국들도 1979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 사고, 1986년 러시아 체르노빌 폭발,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참사 등을 겪으며 기존 원전의 폐쇄를 앞당기거나 신규 건설을 중단하는 방식으로 원전에 대한 단계적인 퇴출을 진행해왔다.
이런 흐름에 따라 캘리포니아주도 2016년 이 지역의 유일한 원전이자 주 전체 전력의 약 10%를 생산하는 ‘디아블로 캐니언’ 발전소를 2025년에 폐쇄하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 2월 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휘발유값이 급등하는 등 ‘에너지 안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며, 탄소 배출이 거의 없는 안정적인 기저부하 전원인 원전을 폐쇄하는 게 적절하냐를 두고 이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5월 원전 사고보다 기후변화를 더 걱정하는 젊은 풀뿌리 환경운동가들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미국에서 원자력 찬성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존 파슨스 매사추세츠공대(MIT) 교수(에너지학)는 신문에 “나는 원자력 공포를 가진 세대이지만, 기후 위기로 인해 예전보다 핵을 즐길 용의가 있다”며 “탄소중립을 하고 싶지만 하루 중 해가 없는 시간과 바람이 불지 않는 기간의 전력 확보가 큰 과제다. 이럴 때 원자력은 필수”라고 말했다.
이런 여론 흐름을 받아안아 민주당 소속인 개빈 뉴섬 주지사도 디아블로 캐니언의 가동 연장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원전이 폐쇄되면 풍력과 태양광만으로 에너지 공백을 메울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다이앤 파인스타인 연방 상원의원(민주당·캘리포니아)도 주 일간지와 자신의 누리집을 통해 ‘내가 마음을 바꾼 이유’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캘리포니아는 기후변화와 싸우는 세계적인 모델이며 가장 도전적인 탄소중립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 목표 달성을 위해 디아블로는 적어도 당분간은 계속 작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이 발전소가 가동 중단을 결정할 때 찬성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미시간주도 같은 상황이다. 민주당 소속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는 2022년 가동 중단이 예정됐던 팰리세이즈 원자력발전소의 폐쇄를 막기 위해 4월 미 에너지부에 서한을 보내 “발전소를 계속 가동하는 게 주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를 둔 뉴욕주, 뉴저지주, 코네티컷주, 일리노이주 등에서도 한때 풍력·태양광에 지원하던 청정에너지 보조금을 원전에도 지원하기로 했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5일 이런 흐름을 전하며, 원전에 회의를 가졌던 민주당 정치인들조차 ‘고육책’으로 기존 원자로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힘쓰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연방정부의 고민도 비슷하다. 에너지부는 지난 4월 허가 기간이 만료되는 원자력발전소의 운영 연장을 돕기 위해 원전 소유주와 운영자에게 60억달러(약 7조9천억원)를 지원하는 정책을 내놨다. 미 행정부는 이 기금 외에도 워싱턴주와 와이오밍주에서 새로운 핵 기술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 두 건에 25억달러(약 3조3100억원)를 지원한다.
유럽의 대응은 엇갈린다. 영국은 4월 러시아의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겠다며 2050년까지 최대 7기의 원전을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벨기에도 2025년까지 원전을 멈추겠다던 기존 계획을 수정해 3월 원자로 2기의 수명을 10년 연장하기로 했다. 프랑스에선 원전 강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온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5월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올해 2월 500억유로(68조원)를 투입해 소형모듈원전(SMR) 등을 최대 14기 건설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위험성 높은 대형 발전소보다 소형모듈원전이 더 안전하고, 만들기도 쉬우며, 핵 폐기물도 덜 생긴다는 것이다.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 곳은 독일이다. 세계 탈원전의 ‘선두 주자’인 독일은 애초 계획대로라면 올해 말까지 국내에서 가동 중인 모든 원전(전체 17기에서 3기 가동 중)을 중단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 방침은 바뀌지 않았지만, 여론은 변화하고 있다. <로이터> 통신은 16일 독일이 원전 딜레마에 놓였다면서, 지난달 독일 방송사(RTL/ntv)의 여론조사 결과 68%의 국민이 자국의 탈원전 정책을 재검토하는 데 찬성했다고 전했다. 유럽의회도 격론 끝에 지난 6일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녹색에너지로 분류하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그린 택소노미(녹색분류체계) 법안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원전이 에너지 위기와 기후변화에 ‘장기적 대안’이 될 수 있느냐에 대해선 여전히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이다. 사고 위험성이 여전하고, 핵 폐기물 처리라는 난제 해결이 어려운데다, 이미 많은 발전소가 노후화됐다는 것이다. 미국의 환경시민단체인 참여과학자모임의 에드윈 라이먼 원자력안전책임자는 “같은 문제로 늘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전했다.
원자력발전의 핵심 원료인 우라늄을 러시아와 주변국에서 수입한다는 점도 원전이 대안이 될 수 없는 중요 이유로 꼽힌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를 보면, 2020년 미국의 원전 소유주와 운영자들은 총 4억8900만달러(6479억원)의 우라늄을 국제시장에서 구매했다. 이 가운데 카자흐스탄 22%, 러시아 16%, 우즈베키스탄 8% 등 옛 소련 국가의 비중이 46%나 됐다. 유럽도 러시아에서 두번째로 많은 우라늄을 수입한다. 외신들은 전쟁 후 강력한 대러 제재에 나선 미국이 원전업계의 거대한 로비 때문에 러시아산 우라늄은 제재 대상으로 삼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미 수십년에 걸친 폐기 흐름 때문에 원자력 기술 인력이 사라지고 전문성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조지아주의 새 원전 건설 현장인 보글 발전소에서 일하는 윌 솔터스 노조 간부는 지난달 23일 <월스트리트 저널>에 “용접공이나 다른 분야의 기술자들을 원자력 노동자로 훈련시킨다. 지금 나라에 원자력 노동자가 거의 없고 있더라도 은퇴했거나 사망했다”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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