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석문(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씨는 내게 멀리 보이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면서 그곳에 희미하게 그어진 선의 아름다움에 관해 종종 이야기했다. 그 까만 실선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등반가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보면 저 선은 정말 아름다운데, 그 안에 혹독한 두려움과 어려움이 살짝 들여다보여요. 참 이상하죠?”
최석문씨는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동안 서서 바위를 바라봤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매혹된 게 분명했다. 그는 또 덧붙였다.
“저 선의 역할은 바위를 장식하는 용도 그 이상일 거예요. 애초에 우리 같은 등반가들을 위한, 등반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아요?”
선배들의 등반 흔적이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
최석문, 이명희씨와 함께 설악산 장군봉 ‘히말라야 방랑자’ 앞에 섰다. 이 루트는 최석문씨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등반선’ 중 하나다. 예전에 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눈으로 보기만 했던 그 까만 선을 기어코 이어 붙였다.
2019년, 더운 여름날이었다. 한창 장군봉 구공길 리볼팅을 한 후 개념도를 다시 그리기 위해 200mm 렌즈로 촬영한 사진에서 구공길 오른쪽으로 2피치 이상의 크랙을 발견했다. 최석문씨가 등반선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때부터다. 그는 곧바로 장군봉에 관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지만, 등반 기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봐도 등반선이 너무나 훌륭한데, 이전에 선배들이 등반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루트 개척 작업을 시작했다.
기존길 3피치까지 올라 소나무에서 왼쪽으로 15m 하강해 2피치가 될 사선크랙에 캠을 설치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쯤에서 군데군데 녹슨 피톤을 발견했다. 등반 흔적이었다. 누군가 이 루트를 초등한 다음 등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듯했다. 주변엔 곧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바위들이 많았다. 선배들의 등반 흔적이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다. 비록 ‘신 루트 개척’에 관한 기대는 사라졌지만 루트 개수라는 사명을 가지고 루트 정비에 들어갔다. 이명희(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씨와 함께 볼트 마킹과 낙석이 될 만한 돌들을 제거하고 정비를 하면서 서서히 그동안 잊혀져 가던 ‘명품루트’가 완성됐다.
히말라야 방랑자 정보, “많이 어렵지 않다”
다음 최석문씨는 각 피치 구간의 정보를 이렇게 적었다.
‘1피치는 50m로 가장 긴 구간이다. 루트개수 전, 중간 부분까지 등반 흔적이 있었지만 이후에는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금강굴 방향으로 쿨와르 등반을 한 다음, 상부와 연결한 듯하다. 확보물 설치가 어려운 지점에 볼트 3개를 설치했다.
2피치는 비스듬한 핸드재밍 크랙 구간으로 크랙의 선이 가장 아름답다. 등반 길이는 35m. 발 홀드를 잘 찾으면 재미있는 구간이다.
3피치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로프 유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넓은 크랙 지점의 오른쪽 바위에 설치되어 있던 링 볼트를 제거하고 새롭게 볼트를 설치했고, 기존길과 합류하는 테라스 아래에 3피치 확보지점을 만들었다. 옛 등반 흔적은 3피치까지였고, 이후 기존길과 합류한 듯하다.
마지막 4피치. 바위 턱을 넘는 지점에 볼트 하나를 설치했고 ‘10월 1일생’ 루트와 종료지점을 같게 만들었지만 여러 상황을 고려하고 다른 루트 등반에 피해가 가지 않고 원활한 등반을 위해 2차 개수 때 별도의 확보지점을 만들었다. 크랙이 끝나는 지점에서 구공길이나 10월 1일생 루트로 등반할 수 있다.’
짙은 녹색의 설악
‘히말라야 방랑자’는 등반가 故김창호씨의 별명이다. 최석문씨는 루트 정비를 하면서 ‘창호 형’이 떠올랐다고 한다. 마침 이명희씨가 히말라야 방랑자로 루트명을 제시했고, 두 말할 필요 없이 찬성했다. 히말라야 방랑자는 이렇게 탄생했다. 선배들의 등반 흔적이 발견됐기 때문에 이후 자료가 발견되거나 원래 개척자가 나타나면 본래의 루트명으로 변경할 것이라고 한다.
이날 늦은 오후 장군봉 정상에 도착했고, 우리는 한 시간 이상 머물렀다. 최석문씨는 내려가고 싶지 않은지 계속 설악의 풍경에 빠져 있었다. 이명희씨가 빨리 내려가자고 재촉했지만 그래도 그는 흐뭇한 표정만 지은 채 먼 산만 바라봤다.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궁금했다. 짙은 녹색의 설악, 정말 환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