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펴보라" 언질 줘도 처벌법 없어.. 채용비리 그물망 '숭숭' [심층기획]

이지안 2022. 7. 1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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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감자 된 '사적채용' 논란
채용청탁·자격요건 변경 등 혐의
권성동·조용병·황준기 무죄 확정
관련법 없어 '업무방해' 적용 한계
재판부 "위계 행사 해당 없음" 판단
일본·미국선 '기업 채용 자유' 존중
법조계 "우리 실정 맞는 법 필요해"
“채용비리 처벌법은 ‘권력자’들을 처벌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정의당 류호정(30) 의원은 지난해 1월 자신이 대표 발의한 ‘채용비리에 관한 특별법’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류 의원은 “국회의원 대다수가 권력자이다 보니 힘없는 청년들이 겪는 ‘불공정’에 대해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채용비리 사건이 최근 대법원에서 줄줄이 무죄 판결을 받은 데 이어 대통령실 ‘사적 채용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공정’ 이슈가 재점화되고 있다. 국민의힘 권성동 당대표 직무대행 겸 원내대표는 ‘강원랜드 채용비리’ 의혹에 이어 이번 사적 채용 의혹에도 연루됐다. 청년들은 ‘공무원 시험 합격은 권성동’ 등 조롱 섞인 냉소와 함께 분노를 터트리고 있다. ‘공정과 상식’을 내건 대통령실마저 부정 채용 의혹에 휘말렸지만, 채용비리를 제대로 처벌할 길은 요원하다는 지적이다.

◆권성동·조용병·황준기… 모두 ‘무죄’ 확정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은 올해 3건의 채용비리 사건에서 모두 유력 인사들의 무죄를 확정했다. 권 직무대행,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 황준기 전 인천관광공사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패러디물.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권 직무대행이 연루된 ‘강원랜드 부정 채용’ 의혹은 공공기관 채용비리의 상징적 사건이다. 국회의원·지역 재력가 등이 청탁을 통해 수백명을 강원랜드에 부정 입사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권 직무대행은 2012년 11월부터 2013년 4월까지 자신의 인턴비서 등 11명을 부정 청탁으로 입사시켰다는 혐의를 받았다. 같은 혐의로 기소된 염동열 전 미래통합당 의원은 지인·지지자 자녀 등 39명을 부정 입사시킨 것으로 조사돼 실형이 확정됐다.

조 회장이 연루된 ‘신한은행 채용비리’ 의혹은 2013∼2016년 신입사원 채용 과정에서 인사담당 임원들이 외부 청탁을 받은 ‘특이자’ 및 신한은행 임직원 자녀 명단을 만든 뒤 이들 중 일부를 사후 면접 점수 변경을 통해 합격시키고, 남녀 합격자 비율도 3(남):1(여)로 인위적으로 조정한 사건이다.

조 회장은 ‘특이자 및 임직원 자녀 명단’에 포함된 특정 지원자에 대해 ‘잘 살펴보라’는 취지로 지시하고, 인사팀 직원들로부터 남녀 비율을 3:1로 맞추겠다고 보고받은 뒤 이를 수기로 결재한 혐의를 받았다.

황 전 사장은 2015년 인천관광공사의 경력직 2급 사업처장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측근 김모씨가 자격기준에 미달하자 김씨의 경력에 맞게 자격요건을 변경한 채용공고를 내고, 인사담당자에게도 계약직이 아닌 경력직으로 뽑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됐다. 결국 김씨는 사업처장직에 지원해 서류·면접 심사 1등으로 최종 채용됐다.
◆무죄 배경엔 ‘업무방해죄’ 적용의 한계

이들이 무죄를 선고받은 것은 ‘채용비리’가 없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세 명 모두 업무방해죄(형법 제314조1항)로 기소됐는데, 업무방해죄로 채용비리를 처벌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결 이유에도 적시됐다.

업무방해죄는 위계 또는 위력으로써 사람의 업무를 방해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이때 핵심은 ‘위계’와 ‘위력’이다. 위계란 상대방에게 착각·오인 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을 말하고, 위력은 폭행·협박이나 사회적 지위 등을 이용해 상대방의 의사를 제압하는 강력한 힘을 말한다. 결국 인사담당자나 권력자 등이 면접위원 등을 상대로 명백한 위계 또는 위력을 행사해 특정 지원자를 입사시켜야만 죄가 될 수 있단 얘기다.

황 전 사장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서류 심사위원과 면접위원들의 업무는 채용절차에서 정해진 서류 심사·면접 업무에 한정된다”며 “인사규정이 정한 자격기준과 일부 다른 내용으로 채용공고를 한 것은 이들에 대한 위계로 볼 수 없고, 응시자가 채용공고 외에 인사규정에서 정한 자격기준도 충족하는지 심사하는 것은 이들의 업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대표이사는 직원을 채용할 때 인사담당자의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 채용과 관련된 지시를 한 것도 위력 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조 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도 “특이자 및 임직원 자녀 명단을 관리하며 면접 점수를 변경한 것만으로는 면접위원들에 대한 위계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또 “조 회장이 ‘잘 한번 살펴보라’는 취지의 말을 했더라도, 불합격에 해당하는 이를 합격시키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업무방해로 기소한 이상 피해자는 신한은행 내부 임직원인 면접위원들인데, 면접위원들은 하나같이 면접 점수 외 요소들을 감안해 합격 여부를 결정한 사정을 미리 알고 있었다거나, 자신들이 업무방해죄 피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견을 밝히며 피고인들의 선처를 탄원하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권 직무대행 역시 “채용 청탁이 있었더라도, 스스로 점수 조작을 한 강원랜드 인사팀에 대한 업무방해는 성립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받았다. 특히 권 직무대행의 경우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이 “권 직무대행이 직접 청탁했다”고 법정 진술했음에도, 진술 외에는 청탁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어 무죄가 났다.

이 역시 채용비리 처벌의 한계를 보여 준다. 김태헌 춘천지검 원주지청 부장검사는 2018년 발표한 논문에서 “부정 채용 청탁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그 내용도 모호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유죄) 입증이 대단히 어렵다”고 지적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해외는 ‘기업 자유’ 존중… “우리만의 채용비리 처벌기준 마련해야”

업무방해죄는 애초 노동자의 쟁의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 조항이다. 국내에서 채용비리를 업무방해로 기소한 것도 2009년에야 시작됐다.

일본의 경우 채용비리에 업무방해죄를 적용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업무방해죄와 유사한 규정 자체가 없다. 미·일은 사기업의 부정 채용에 대해 형사처벌 하는 사례가 흔하지 않다. ‘기업의 자유’를 존중하는 차원에서다.

법조계에서는 “우리 실정에 맞는 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권영국 변호사는 “한국 사회는 채용비리 현상이 너무 뿌리 깊어 법 제도가 아니면 통제가 어려운 상황”이라며 “채용비리의 개념을 정의하는 등 우리만의 기준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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