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프런티어 해양인 열전] <14> 해양가요 평론가 박명규
- 공학도로 바다 관련 노래에 매료
- 해난사고·이민 위로한 곡들 연구
- 국내외 뒤지며 희귀 음반도 발굴
- 소장 SP·LP레코드판만 5000장
- 해양가요 27%가 부산항이 배경
- 영도대교 가치 강조하며 지켜내
- “해양인 육성, 노래에 해답 있다”
바다와 노래는 어떤 관계일까. 바다가 있어 노래가 생겼지만 노래 없이는 바다도 없다. 해양가요가 있기에 바다는 비로소 ‘큰물 웅덩이’가 아닌 삶의 무대가 된다.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이라 부르고야 바다가 원망스럽다. “울러라(울어라) 울러라 새여”로 시작한 고려가요 ‘청산별곡’이 “바라래(바다에) 살어리랏다”로 이어지듯 노래가 있어야 바다가 있다.
■“해양가요는 바다 백과사전”
박명규(75) 한국해양대 명예교수가 말했다. “해양가요는 바다에 관한 백과사전이다. 노래 가사에 바다의 역사와 정서, 그 모든 게 담겨 있다.” 과연 1939년 남인수가 부른 노래 ‘울며 헤진 부산항’은 식민지 실상을 그려냈고 1960년대 항구의 이별 노래는 중동 근로자 파견과 월남파병의 시대상을 담아냈다. 40년간 모은 SP, LP 레코드판 5000장을 소장하고 해양가요에 관한 글을 꾸준히 써온 박 교수의 연구 내용이다.
부산 동구 좌천동에서 박병옥과 조인순의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명규는 어린 시절부터 댄디스트였던 부친 덕에 대중가요에 귀를 적시며 자랐다. 1966년 고교를 졸업하면서 담임교사의 권유로 인하대 공대 선박공학과에 진학하고 나니 조선 붐이 불면서 졸업 전 취업은 떼놓은 당상이었다. 1970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3년을 근무한 그는 일본 선박회사로 옮겼다가 스웨덴 찰머스대학 연구소에 파견돼 당시 최첨단 기술 CAD/CAM(컴퓨터 설계시스템)을 배웠다. 귀국 후인 1982년 한국해양대 조선해양개발공학부 교수가 된 그는 50권의 저서와 선박설계 강의로 한국을 세계 최정상의 조선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교수로 근무하면서도 무개형(無蓋型) 컨테이너 선박을 비롯해 한국해양대 실습선, 쇄빙연구선 아리온호 등 선박 19척을 설계했다. 2010년엔 해양조사선 ‘바다로 2호’ 설계로 국토해양부 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공학자 시각으로 해양가요 분석
선박공학을 전공하면서도 박 교수 머리에선 해양가요가 떠나지 않았다. 노래가 빠진 공학은 왠지 시들했다. 한때 무성했던 해양가요 인기가 시드는 게 안타까웠고 부친이 모아놓은 레코드판 2000장도 버리기 아까웠다. 김순갑 전 한국해양대 총장이 분석해보니 대중가요 3800곡 중 9%인 330곡은 해양가요였다. 특히 ‘한국 레코드산업 발상지’를 자처한 부산에서 제작된 윤일로의 ‘항구의 사랑’ 등은 당대의 히트곡이었고, 백야성의 ‘마도로스 부기’ 등 검은 선글라스에 파이프를 물고 항구를 드나드는 마도로스를 그린 노래는 해양가요의 백미였다.
박 교수는 공학자의 눈으로 해양가요 분석에 나섰다. 레시프로 엔진, 터어빈 엔진으로 움직이는 ‘철선’, ‘화륜선’, ‘기범선’과 증기 동력, 발동기로 움직이는 ‘똑닥선’의 구분법을 밝혔다. 선박 연료인 아주까리기름으로 선술집 등잔을 밝혔기에 ‘아주까리 선창’이란 제목이 나왔다거나 ‘항구’, ‘포구’가 어떻게 다른지, ‘뱃머리’, ‘데크’, ‘마스트’, ‘닻’ 등의 용어는 제대로 쓰였는지도 고찰했다.
■이미자 ‘섬색씨’ 등 희귀음반 발굴
내쳐 서울 황학동 등 전국의 중고 장터를 뒤지며 최정명의 ‘항구의 사나이’부터 문주란의 ‘크리스틴 킬러’, 최진희의 ‘소원’, 린다 김의 ‘깊은 정’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노래가 담긴 희귀 음반을 찾아냈다. 미국 출장길에는 시카고의 미국인 집에서 노래를 부른 이미자 자신도 기억을 못하는 노래 ‘섬색씨’가 담긴 음반도 발견했다. 이어 반야월과 오기택 하춘화 조미미 등 유명 가수와 작곡가와 작사가, 음반회사를 찾아가 해양가요 취입 여부와 레코드판 소유, 노래비 소재 등을 탐문했다. 전국의 노래비를 찾아다니던 중 ‘찔레꽃’을 부른 가수 백난아의 고향 제주도 한림읍에선 그가 나온 초등학교도 방문했다. “일반인이 가수를 만나기는 어려웠다. 친척인 연극배우 손숙 씨를 통해 어렵게 반야월 선생을 만났더니 처음엔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의아해하다가 나중엔 자신들 일을 대신해줘 고맙다고 인사했다.”
■해난사고·이민 관련 해양가요 연구
낮에는 연구와 수업, 세미나에 쫓기던 박 교수는 자정 무렵에야 레코드판을 틀어놓고 해양가요 관련 글을 쓰다 보니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특히 그는 해난 사고와 이민에 관한 해양가요 연구에 주력했다. 한일호부터 남영호, 서해페리호 등 연이은 해난 사고 직후 발표된 ‘비운의 한일호’, ‘밤 항구 연락선’, ‘님 실은 페리호’ 등의 노래를 발굴해 가사와 사회의 반응을 되짚어냈다. 껌팔이 소년과 보따리장수 등 75명이 숨진 ‘한일호’ 사고 후에는 온 국민이 “차거운 북동풍이 몰아치는 밤 / 목 메인 고함소리 울지도 못하고”란 가사를 부르며 함께 울었다. 1950, 60년대 하와이와 멕시코, 브라질로 떠난 이민자를 위해 남일해는 ‘향수의 브라질’, 남상규는 ‘브라질 이민선’ 등의 노래로 위안했다.
그런 해양가요의 공감과 위로에 대해 2001년 박명규 교수는 ‘해양 마케팅의 마도로스 대중가요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발표했고, 이를 본 당시 문화체육부 장관은 “세종문화상 감”이라 극찬했다. 그의 감상문 “사랑에 병들어 술을 마시고 가슴에 타는 불길 잡지 못해 기어이 울어버린 여인”은 그 자체로 또 한 편의 노랫말이었다. 실제로 그는 아라온호를 설계하면서 인순이가 부른 ‘극지의 노래’ 가사를 지은 것을 비롯해 석현의 ‘추억의 부산항’, 백야성의 ‘아! 대한민국 항해사’ 등을 작사했다. 박 교수는 해양가요 연구성과가 알려지면서 ‘부산의 노래, 바다의 노래’를 비롯해 ‘아침마당’, ‘6시 내 고향’ 등의 방송에 잇따라 출연했다. 하지만 감당하기 힘들 만큼 출연과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통에 결국 그는 집 전화를 제외한 모든 통신수단을 없앤 터라 지금도 휴대전화가 없다.
■전화번호부 뒤져 ‘굳세어라 금순아’ 실존인물 찾아내
한국의 해양가요 상당수가 일본 노래를 모방했으리란 건 합리적 의심이다. 해방 후 한동안 부산에는 밴드 연주에 맞춰 미소라 히바리 등의 일본 해양가요를 부르는 세칭 ‘클럽’이 300개소나 됐다. 그러나 한국에는 1952년 현인이 부른 ‘굳세어라 금순아’가 있다. 일본에서 성악을 배운 현인이지만 그를 유명 가수로 만든 건 그 노래였다. 박명규 교수는 1년간 부산 전화번호부와 호적, 선박명부를 뒤져 ‘금순이’가 영도 남항동에 실존한 ‘조금순’이고 배 이름 중에도 ‘금순호’가 있음을 밝혀냈다.
2001년 영도대교(영도다리) 보존을 놓고 갑론을박이 일자 고(故) 안상영 부산시장은 박 교수에게 영도대교의 지속적 사용 가능 여부와 문화적 가치를 연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그는 “향후 100년 이상 사용 가능”이란 연구 결과와 함께 ‘부산항 관련 해양 대중가요의 역사적 고취 ; 영도대교를 중심으로’란 논문으로 “해양가요의 27%가 부산항이 배경이고 그 중심이 영도대교인데, 그게 사라지면 현대사 랜드마크가 사라진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영도대교를 지켜냈고, 그 옆에 현인 동상과 노래비 자리를 잡아주며 노래비 디자인까지 조언해줬다.
국제신문에 ‘이동순의 부산 가요 이야기’를 연재 중인 이동순 시인은 말했다. “‘마도로스 가수’라 불리던 백야성의 ‘잘 있거라 부산항’에 심취해 결국 마도로스가 된 사람도 있다.” 40년간 해양가요를 연구한 노교수도 안타까운 듯 말했다. “요즘 바다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배 타려는 사람도 줄어든다. 지금이라도 해양가요가 울려 퍼지면 바다에 대한 관심도 커지지 않을까?”
부산은 해양가요의 도시다. 하지만 노랫소리가 줄면서 바다도 좁아지고 있다. 부산항에 해양가요 노래비를 더 많이 세우자는 박 교수의 주장은 그 사태를 막아보자는 것일 테다.
▶도움 말씀 주신 분 = 김순갑 한국해양대 전 총장(4대), 이동순 시인·가요평론가
※ 공동 기획=국제신문·한국해양수산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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