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고 잘하는 건 아니지만, 이기는 건 아니지만, 1등 하는 건 아니지만..좋아하는 걸 멈출 필요는 없어[김유진의 구체적인 어린이]

김유진 2022. 7. 18.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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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오늘날 스포츠 서사가 말하는 것
< 5번 레인 >의 삽화. 문학동네 제공
적자생존의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빙판을 달리고 공을 던지고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며
밀리고 지고 못하고 좌절하고…수많은 실패를 경험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걸 찾아 결국 ‘나’를 알게 된다

그래픽 노블 <롤러 걸>(빅토리아 제이미슨 글·그림, 노은정 옮김, 비룡소, 2016)은 ‘롤러 더비’라는 경기를 우연히 관람한 애스트리드가 이 스포츠에 빠져 롤러스케이트 타는 법부터 배우며 경기장에 서기까지의 이야기다. 주로 미국에서 열리는 팀 스포츠인 롤러 더비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계속 트랙을 돌면서 ‘재머’인 선수가 상대팀의 ‘블로커’ 선수들을 한 사람 앞지를 때마다 1점씩 얻는 경기다. 재머가 앞지르지 못하도록 블로커들이 몸으로 막아내는 과정에서 서로 치고 받는 몸싸움도 하고 부상 위험도 있어 꽤 위험한 스포츠에 속한다. 유튜브에서 본 경기 영상은 빙상 경기의 스피드에 미식축구의 몸싸움이 결합된 듯 무시무시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롤러 더비가 현재는 거의 여성 선수의 스포츠라고 하니 좀 더 흥미로워 보이기도 했다.

롤러 걸 빅토리아 제이미슨 지음·그림 | 노은정 옮김 | 비룡소 | 2016년

<롤러 걸>의 애스트리드는 첫 관람에서 로즈 시티 롤러즈 팀의 재머인 ‘레인보우 바이트’ 선수의 멋진 경기 장면를 보고 자신도 롤러 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는 주니어 롤러 더비 캠프에 참가한다. 뭐든 함께하던 절친 니콜이 마다해도 홀로 씩씩하게 주니어 로즈 버드팀의 일원이 되었지만 바퀴 달린 신발을 신은 채 제 맘대로 달리고, 멈추고, 조정하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게다가 거친 롤러 더비에서는 ‘들이받기’ ‘성난 표정 짓기’ 같은 훈련 또한 필수다.

고된 훈련에도 불구하고 좀체 늘지 않는 실력 때문에 실의에 빠진 애스트리드는 어느날 레인보우 바이트 선수의 사물함에 팬레터를 남긴다. “저는 이 지구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가운데 ‘님’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정말 멋져요. 언젠가는 저도 님처럼 스케이트를 타고 싶어요. 진심으로, 못난 로즈 버드 올림.”(<롤러 걸> 86쪽) 며칠 후 레인보우 바이트의 사물함에는 ‘못난 로즈 버드에게’ 보내는 답신이 붙어 있다. “포기하지 말고 이렇게 말해 봐. 더 굳세게, 더 강하게, 겁내지 말고!”(<롤러 걸> 93쪽) 편지에 쓰인 짧은 격려에 애스트리드는 다시 롤러 더비 연습에 최선을 다해 몰입하기 시작한다.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 리부트를 지나며 국내외 아동청소년 문학에서는 여성 어린이와 청소년의 자기 긍정을 말하는 작품이 부쩍 늘어났다. 그중 종종 눈에 띄는 작품이 바로 이 책처럼 여성 주인공이 스포츠를 통해 건강한 신체를 만들고 자기 몸을 긍정하면서 자기 존재를 발견하는 이야기다. 최근 스포츠 회사 광고에서 볼 수 있듯 스포츠가 성인 여성의 임파워링(empowering, 힘 돋우기)에서 부각되는 경향과 비슷하다. 중량과 사이즈를 줄이는 다이어트 같은 운동, 코르셋 같은 운동이 아니라 근육으로 자신을 만들고 키우며 발산하는 운동이 이제 비로소 여성의 운동이 된 것이다. 그림책 <선>(이수지, 비룡소, 2017), <야, 그거 내 공이야!>(조 갬블, 후즈갓마이테일, 2018), <코숭이 무술>(이은지, 후즈갓마이테일, 2018), <첨벙!>(베로니카 카라텔로, 미디어창비, 2019), <슛!>(나혜, 창비, 2021)과 동화 <축구왕 이채연>(유우석, 창비, 2019) 등이 손꼽을 만한 작품이다. 여기서 여성 어린이는 빙판 위를 달리고, 슛을 날리고,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며 수많은 실패 속에서도 마침내 튼튼한 심장을 끌어올린다.

<롤러 걸>에서도 레인보우 바이트의 조언, “더 굳세게, 더 강하게, 겁내지 말고!”는 경기장뿐 아니라 애스트리드의 모든 일상에서 힘이 되어 자신의 길을 찾도록 돕는다. 고작 머리 염색 하나에 망설여질 때, 친구 니콜에게 사과해야 할 때 애스트리드는 되뇐다. “더 굳세게, 더 강하게, 겁내지 말고!” 다른 롤러 더비 선수들처럼 강하게 보이려고 머리카락을 물들였을 뿐인데 마약을 운운하는 친구의 힐난과 엄마의 걱정이 쏟아졌으니 머리 염색도, 롤러 더비도 사실 그리 만만한 선택은 아니다. 친구들이 남자와 패션과 화장에 신경 쓰며 인기 있는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것과 정반대 길을 선택하는 투쟁이다. 애스트리드는 롤러 더비를 선택하며 레인보우 바이트와 똑같은 무지개색 양말을 신고 경기장에 나선다. 예전엔 ‘못난 로즈 버드’라고 겸양하던 자신을 만족스러워했지만 이제는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불타는 소행성 에스테로이드(asteroid)”(<롤러 걸> 208쪽)를 선수 이름으로 삼고 경기장을 힘차게 질주한다.

플레이 볼 이현 지음 | 최민호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6년

일등이 되어야 하는 승부의 세계에서

애스트리드가 롤러 더비 선수로서 느낀 좌절은 잠시 지날 과정이었고, 이제 더 즐겁게 연습하며 기량을 쌓는 일만 남았다. 애스트리드에게 스포츠는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방향을 찾아 결국 자신을 알게 하는, 무한 긍정의 방향지시등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스포츠의 전부는 아니다. 익히 알듯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의 링에서 스포츠는 일등이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러한 프로의 세계에서 스포츠를 하는 어린이들이 있다.

<플레이 볼>(이현, 한겨레아이들, 2016)의 구천초 야구부는 50년이 넘는 역사가 무색할 정도로 전국소년체육대회 지역 예선전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는 실력이다. 그저 야구가 좋아서 모인 야구부원에게 새로 온 감독님은 지금까지와 다른 목표를 설정하는데 그건 바로 ‘최선이 아니라 최고’가 되라는 것.

“최선, 참 좋은 말이지. 취미 삼아 운동을 하는 거라면. 하지만 선수는 달라. 최선을 다했다고 이기는 건 아니야. 그래서 난 최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최선이 아니라, 최고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이길 수 있어.” - <플레이 볼> 31쪽

새 감독님은 중요 경기의 선발 라인업에도 중학교 야구부에 진학해야 하는 6학년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실력만 따져 4, 5학년을 기용한다. 경기 중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실수를 하면 가차 없이 라인업에 밀려나는 건 당연하다. 4번 타자 겸 투수였던 한동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야구를 좋아하는 엄마의 배안에서부터 야구 선수로 길러지고 야구밖에 모르던 동구는 내일도 야구를 하고 싶다면 무조건 이기라는 감독님의 말에 마음이 무겁다. 자신에게 그만한 재능이 없다면 야구를 그만두어야 하나. 노래를 좋아한다고 가수가 되는 건 아니듯 야구를 좋아한다고 야구 선수가 되는 건 아니며, 상위 1%의 선수에게만 야구를 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아빠의 조언 또한 뼈아픈 ‘팩폭(팩트폭력)’으로 날아온다.

잘해야만 계속할 수 있는데, 좋아하거나 애쓴다고 해서 잘하는 게 보장되지는 않는 게 프로 스포츠의 세계다.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열심히 한다고 해서 점수가 주어지지는 않는 세계. 잘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의 작동 방식과 유사하다. 구천초 야구부원과 모든 어린이 운동 선수는 미래에 그들이 어른으로 살아가야 할 세계를 미리 힘겹게 경험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사교육의 장에서 학업 경쟁 중인 우리 어린이들이 살아가는 세계일지도. 학대 수준의 학업에 내몰린 어린이들이 동구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무언가를 탐색하고, 좋아하고, 몰입하고, 실패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이 세계의 논리를 내면화했다는 거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생존에 유리한 직업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는 어린이들은 동구와 같은 고민을 언제쯤 맞이하고 돌파할 수 있을지.

한편 한강초 수영부 에이스 강나루에게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사이에서 느끼는 고민 따위는 없다. 팀 스포츠이자 전략이 중요한 야구와 달리 물속에서 오직 자신의 맨 몸으로 0.01초를 다투는 수영 선수 나루에게 승부의 냉혹함은 늘 물속에서 느껴온 저항처럼 일찌감치 감지됐을 거다. 나루는 승부의 냉혹함을 잘 알고, 승부에 집착하는 선수다. 학교 수영부의 두 시간 정규 연습 외에도 수업 전 0교시에 한 시간씩 혼자 연습하는 노력파이며, 노력대로 중요 대회에서 메달권에 들었다. 라이벌 김초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나루는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라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결과가 상관이 없으면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을 텐데”(<5번 레인> 72쪽)라고 반문한다. 체조선수였던 엄마가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그런 거 끝까지 안 해 본 사람들이 하는 말”(<5번 레인> 175쪽)이라며 성취와 상관없이 노력으로 충분하다고 다독이지만, 인내 끝에 열매가 없어도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최선과 최고, 승리와 패배에 대해 나루와 코치님의 대립되는 견해는 <플레이 볼>에서의 감독님과 야구부원들의 대립과는 정반대로 대칭된다.

“나루야, 코치님은 이기고 지는 게 수영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

“하지만 시합은 이기려고 하는 거잖아요. 저는 이기고 싶어요.”

“평생 이기는 시합만 하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어. 누구나 질 때도 있는 거야. 어쩌면 어떻게 지느냐가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해.”

“잘 모르겠어요.”

“한번쯤은 너 스스로 왜 수영을 하는지 천천히 생각해 보면 좋겠다.”

- <5번 레인> 47~48쪽

5번 레인 은소홀 지음 | 노인경 그림 | 문학동네 | 2020년

4번 타자와 4번 레인에서 밀려나면

누구나 질 때도 있듯 한동구는 5번 타자로, 강나루는 5번 레인으로 밀려난다. 아무리 노력해도 실패할 수 있는 게 스포츠의 세계고, 현실의 세계다. <플레이 볼>과 <5번 레인>에서 승부는 중요하지 않으니 오직 최선을 다하라고, 아름답고 속 편하게 미리 결론짓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일 거다. 두 동화는 어린이라면 스포츠를 통해 우정이나 화합을 배우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각자도생과 능력주의가 사회 구성 원리로 정당화되는 분위기에서 적자생존의 경쟁을 없는 듯 취급하는 건 어린이 독자를 기만하는 태도일 수 있다. 사회는 이미 많은 어린이를 일등만 알던 강나루로 키워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능력주의와 성장 신화를 비판한답시고 어린이 독자의 꿈을 좌절시키고 패배주의를 가르칠 일도 아니다. 두 동화는 어떻게 답할까.

<플레이 볼>의 마지막 경기, 동구는 패배가 확실한 상황에서 묵묵히 공을 던진다. 야구는 어떤 경우에도 스리 아웃을 잡아야 끝나는 경기, 아무리 안타를 많이 맞아도 저절로 끝나지 않는 경기라는 걸 알기에 괴로워도 나선다. 야구는 내내 잘하고 이기는 경기가 아니라 잘 못하고 지고 괴로워도 다시 운동장에 서야 하는 경기라는 걸 깨닫는다. 흔히 야구가 인생과 비슷하다고 말하듯 초등부 야구 선수 동구는 야구로 인생을 배웠다. <5번 레인>의 나루 또한 결과가 좋든 나쁘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정정당당하게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배운다. 그래야 승리의 기쁨도, 패배의 분함도 떳떳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나루는 또 나루답게 “다음번 터치패드는 내가 제일 먼저 찍을 거야”(<5번 레인> 227쪽)라며 승리를 다짐한다.

책을 덮으면서 궁금해진다. 좋아한다고 잘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걸 멈출 필요는 없다며 중학교 야구부에 들어간 동구는 여전히 야구를 하고 있을까. 나루는 다시 1등을 하고, 체육중학교에 가고, 국가대표가 될까. 둘 다 계속 운동을 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책에서 내내 말하는 걸 읽고도 궁금해지니 참,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든든하다. 야구와 수영을 계속하든 안 하든 동구와 나루라면, 좋아하는 걸 찾아 혼신의 힘을 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어디서든 건강하고 힘차게 잘 지내고 있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김유진



아동문학평론가·동시인.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를 출간했고, ‘토닥토닥 잠자리 그림책’ 시리즈를 썼다.

아동문학 작품 속에서 어른과 어린이가 좀 더 자주 만나고, 좀 더 가깝게 이어지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김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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