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깎아 인플레 버티기..취약 노동자 숨통 죈다
7년간 되레 임금 '31% 삭감'
인플레에 실질임금 더 하락
"임금 인상이 아닌 회복 요구"
정부 외면, 원청 "협상은 하청 몫"
하청, 원청 눈치보며 협상 소극적
'안전 일터 만들자'조차 합의 거부
인력난에도 노동자 쥐어짜기만
“끝까지 할 겁니다, 우리는.”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서문 다리 앞, 삭감된 임금 30% 회복을 요구하며 시작된 처절한 싸움의 복판에서 지난 9일 <한겨레>와 만난 김형수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거제·통영·고성 조선 하청 지회장(조선하청지회·거통고지회)은 마음을 다졌다. 그로부터 아흐레 뒤인 18일, 조선하청지회가 파업하고 조선소 도크를 점거한지 47일째를 맞았다. “나한테 용접 가르쳐 준 사람, 술·담배도 안 하는 세상 고지식하고 착한 사람, 몇 년 동안 365일 빠짐 없이 일한 놀라운 사람, 저 사람처럼만 조선소 생활하면 되겠구나 본 받았던 사람”인 그의 동료 유최안 부지회장이 스스로를 1㎥ 철제 구조물에 가두고 농성한 지도 27일 째가 되었다.
이날 정부에 의해 “불법 점거 농성”으로 규정된 채 언제일지 모를 ‘공권력 투입’ 가능성 앞에 놓였어도 조선하청지회 노동자의 파업과 점거는 이어진다. 절박해서다. 그 배경에 인플레이션을 거치며 또다시 크게 뒤처질 임금에 대한 공포가 있다. 저임금을 잔업특근으로 메워왔던 조선하청지회 노동자들은 조선업 불황으로 잔업특근이 준 데다 상여금이 상당 부분 삭감되면서 임금이 크게 하락했다. 2014년 4974만원을 받던 15년차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의 임금은 2021년 3429만으로 31% 감소했다. 7년 동안 소비자 물가는 8.8% 올랐다. 불과 1년 만에 4~6%(전년 동월 대비) 물가 상승률을 기록한 올해 인플레이션 앞에서 조선 하청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한 발 더 빠르게 뒤쳐졌을 것이다.
물가 상승기 뒤처지는 임금의 공포는 조선하청 노동자를 넘어 2022년 숱한 취약 노동자가 공유한다. 올해 1분기 300인 이상 사업체 월평균 임금이 전년 같은 기간보다 13.2% 올라 694만3938원이 되는 동안, 30인 미만 사업체 임금은 4.2% 올라 308만5003원에 그쳤다.(사업체노동력조사)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노동자에 따라 차별적인 교섭력’을 꼽는다. 저임금 불안정 노동일수록 임금 인상을 요구할 힘이 적다. 반면 물가 상승의 타격은 이들이 가장 크게 입는다. 그래서 대개 가장 처절하다.
<한겨레>는 인플레이션 시기 힘 없는 노동자의 임금 협상 테이블에 올려진 현재와 미래에 얽힌 질문을 돌아보기 위해 올해 최저임금 노동자, 특수고용직 노동자, 하청 노동자의 임금협상에 나섰던 이들을 지난 5~12일 차례로 만났다. 질문은 각자의 처지를 넘어 정부가 강조하는 ‘국가 경제’ 전반을 향한다.
최저임금의 테이블: 고통의 배분
마지막 최저임금위원회 협상이 이어진 6월29일, 협상장 구석에 박스들이 무연히 놓여있다. “최저임금 노동자 1만8천명이 손글씨로 쓴 엽서에요. 꼭 읽어 달라고 공익위원들한테 말했는데 결국 마지막 날까지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지요.”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 쪽 위원으로 참여한 박희은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설명했다. 엽서에는 대개 ‘최저임금이 올라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고성 섞인 항의와 울먹임, 끝내 민주노총 노동자 위원들은 퇴장했다. ‘국민경제 생산성 증가율’만 고려한 간단한 산식을 통해 2023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5%로 결정됐다. 엽서에 적힌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는 고려하지 않았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는 국민경제 평균으로 셈하기 곤란하다. 물가 상승은 저임금 노동자 생계에 차별적인 타격을 입힌다. 한국경제연구원은 2018~2019년 대비 2020~2021년을 비교했을 때 소득 하위 20%의 체감물가 상승률이 상위 20%에 견줘 1.4배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했다. 주거, 식료품, 보건 등 피할 수 없는 소비에 소득의 대부분을 지출하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이 본격화 된 2022년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는 한층 더 위협 받을 것이다.
고물가·고환율·고금리로 인한 중소기업의 어려움은 올해 최저임금 인상폭을 제한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언급됐다. 박희은 부위원장은 반박했다. “중소기업의 어려움 인정합니다. 다만 코로나 기간 많은 돈을 번 대기업이 인플레이션의 부담을 같이 짊어져야죠. 하도급을 통해서 중소기업에 부담을 전가하고, 결국 그 맨 밑에 최저임금 노동자가 책임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 시기 최저임금위원회 테이블은 물가상승과 경기둔화라는 사회적 고통을 저임금 노동자, 그들이 속한 영세·하청업체, 이들과 하도급·프렌차이즈 관계로 얽힌 대기업이 배분하는 공간이었다. 황선웅 부경대 교수(경제학)는 “비용 압박에 따라 이윤이 줄어들 때 기업은 이를 보존하기 위해 어떻게든 출구를 찾을 텐데, 정부의 정책적 의지나 제도의 개입이 없는 상태라면 특수고용직이나 소규모 사업장의 취약한 노동자들로 부담이 쏠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고 말했다.
화물연대의 테이블: 정부의 역할
지난 6월 안전운임제를 논의하는 다섯 차례의 협상장에서 박귀란 화물연대 전략조직국장은 정부의 무책임 앞에 낙담했다. “안전운임제라는 제도와 정부의 태도가 우리한테 유일한 안전망이자 교섭 창구이니까요.” 확인해 보고 돌아오겠다는 정부를 기다리고, 합의한 내용이 번복되고, 항의하고, 결렬되고, 재협상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런 협상이 어느 날은 8시간, 어떤 날은 10시간씩 이어졌다. 애초 합의에 함께 참여하기로 한 여당은 최종 협상을 앞두고 12일 돌연 태도를 바꿨다. “잠깐 발표일정을 조율하겠다더니 갑자기 합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어요.”(박귀란 국장)
정부의 의지와 제도는 화물노동자에게 절대적이다. 이들에게는 대화에 응하는 ‘사’가 없다. 사실상 임금(운임) 결정권한을 쥔 화주들은 화물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안전운임제는 화물 노동자의 과로를 막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 공익위원, 화물노동자, 화주단체, 운수회사 등이 모여 안전운임을 결정하고 유류비 변화를 반영해 운임을 정한다. 정상적인 노사 교섭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정부가 주도한 사회적 합의로 구한 일종의 궁여지책인 셈이다.
정부는 임금 협상의 유일한 실마리를 스스로 흔들었다. ‘노사 자율’이라는 비현실적인 원칙론이었다. 박연수 화물연대 정책기획국장은 “사쪽이 만나 주지도 않는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노사 자율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부 스스로 마련한 제도의 취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택배 노동자를 대표하는 전국택배노조 또한 ‘노사 자율’만 강조하는 정부 앞에 막막하다. 택배 노동자 역시 그나마 지난해 합의한 ‘택배기사 과로방지 대책 사회적 합의기구 합의문’을 쥐고 택배회사에 시스템 개선을 요구해왔다. 그마저 쉽지 않았다. 올해 초(2021년 12월28일~3월3일) CJ대한통운에 합의문을 이행하라며 3개월 동안 파업하고, 점거하고, 단식했는데 택배회사 본사는 만나지 못했다. 진경호 전국택배노조 위원장은 “물가 상승으로 부담이 커진 기사들이 다시 과로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하반기에는 택배 수수료 인상을 요구해야 하는데 솔직히 누구한테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노사교섭이라는 완충장치도, 그 공백을 메울 정부의 의지도 없다보니 파업은 잦고 격렬해진다. 회사 뿐만 아니라 노동자에게도 두려운 일이다. “지난해 연말부터 3개월 동안 벌이도 다 포기하고 파업했으니 아직까지도 가정불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조합원이 많아요.”(진경호 위원장)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 등 정부 역할 없이는 마땅한 협상력을 갖지 못하는 노동자의 임금 후퇴는 중장기적으로 경제 전반에 타격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는 “저소득층의 소비 성향(소득대비 소비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섭력 없는 저임금·불안정 노동자의 실질임금 하락은 결국 소비 둔화로 이어져 경기침체를 가속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 하청의 테이블: 일터의 미래
인플레이션 앞에서도 이어지는 임금의 추락, 교섭은커녕 만날 수도 없는 회사, 정부의 무관심, 그럴수록 격렬해지는 싸움은 그렇게 옥포조선소의 하청노동자들한테 임했다.
조선하청지회는 2021년 5월부터 각 하청업체들에 노동조합과 개별 교섭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난 1년 별별 일을 다 겪었다”고 김형수 지회장은 말했다. “교섭하자는데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업체도 있었어요. ‘협력해서 안전한 일터를 만들자’는 돈 안드는 문구조차 합의할 수 없다고 했어요. 개별 하청업체가 나서서 합의를 한 개라도 하면 원청에 찍힐텐데 누가 합의를 해주겠어요.” 하청업체 21곳과 집단 교섭 틀을 마련하고, 이를 통해 원청 대우조선과 대주주 산업은행을 움직이기로 한 이유다. 노동자가 귀하면 임금이 오른다는 자연스러운 시장 논리 또한 조선소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조선소의 인력 부족은 이미 회사도, 정부도 인정하지만 임금만은 하락한다. “회사는 있는 사람 그대로 더 쥐어짜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김 지회장은 확신했다.
인플레이션을 저임금 노동자의 임금 삭감으로 버티는 산업, 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2일 ‘2022년 한국은행 국제 컨퍼런스’에서 “양극화 현상이 인플레이션으로 더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양극화에는 개인의 소득 격차 뿐만 아니라 산업 부문 간 격차도 포함된다. 김형수 지회장도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인플레이션이 조선소에 남길 후유증을 염려한다. 다른 산업이나 물가에 견준 상대적인 임금은 더 가파르게 하락할 것이고, 더 많은 노동자가 떠난 끝에, 내 일터 또한 열등한 산업으로 뒤처지리라는 불안이다. “힘들고 위험하고 임금도 적은 조선소에 젊은 사람들은 오지 않으니 지금도 59살인데 막내라서 눈치 보다가 물통 채우는 노동자도 있어요. 남아 있는 사람들한테 더 과도하게 일을 시키고 노동자는 더 오지 않고 기술은 끊기겠죠. 경영자와 국가 책임인데 왜 우리가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거제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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