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국경 거래 암호화폐 성격 논란] 증권이냐 상품이냐..美 해석 지켜보는 국내 가상자산 업계
암호화폐를 두고 미국 국회 및 기관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일부 코인에 대해 증권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한편 상원에서는 일부 암호화폐를 상품(commodities)으로 봐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돼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만일 암호화폐가 증권으로 해석된다면 앞으로 가상자산 시장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 수년간 ICO(암호화폐 공개) 등을 통해 발행한 코인들이 해당 법을 적용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암호화폐가 상품으로 간주될 경우 이러한 규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국내 가상자산 관계자들은 미 당국이 어떤 해석을 내놓느냐에 따라 국내 규제 방향성이 달라진다며 미국의 결정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국내 가상자산 업계가 미국의 해석을 지켜보는 배경엔 암호화폐 시장이 지닌 특수성이 있다. 암호화폐 시장은 일반 금융 시장과 다르게 국경을 뛰어넘어 거래되고 있다. 따라서 암호화폐 규제는 초국가적 대응으로 이어진다. 시장을 선도하는 미국이 어떤 해석을 내놓느냐가 세계적인 관심 사안이 되는 이유다.
먼저 암호화폐 시장에 칼을 겨눈 곳은 SEC다. 최근 SEC는 세계 최대 암호화폐 거래소 바이낸스가 발행한 바이낸스코인(BNB)에 대해 증권법 위반 여부가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지난 2017년 7월, 바이낸스는 BNB를 2억 개 한도로 발행하고, 이 중 절반을 당국 등록 절차를 거치지 않고 ICO를 통해 판매했다. 이후 BNB가 증권과 비슷하다는 의견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오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에서 등록하지 않은 증권 판매는 불법이다.
SEC 결론이 나오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만일 바이낸스가 증권법을 위반했다는 판단을 받으면 BNB와 비슷한 코인 및 바이낸스의 추후 사업 진행에도 걸림돌이 생길 수 있다. 앞서 SEC 조사를 받은 리플(XRP)의 경우, SEC와 법적 공방이 길어지며 진행하던 사업이 차질을 빚고 있다.
김래현 베가엑스 전무이사는 “코인을 신규 발행할 때, 대부분 이전에 나온 코인을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며 “BNB가 리플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이를 벤치마킹한 코인들 역시 SEC 타깃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번 SEC 조사가 ‘바이낸스 죽이기’ 기류로 흘러갈 때, 다른 스테이블코인(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된 암호화폐) 및 바이낸스와 연관된 코인들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바이낸스는 중국계 자본이 많이 들어간 것으로도 알려져 그동안 미 당국의 심기를 건드려왔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미 규제 당국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 바이낸스와 관련된 코인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이럴 경우 바이낸스가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인 바이낸스 USD(BUSD) 가치도 하락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런 와중에 6월 7일(현지시각) 미 상원에서 몇몇 가상화폐를 유가증권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하자는 법안이 발의된 것은 업계에 호재다. 그간 가상자산 업계에서는 SEC가 아닌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가 관할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SEC가 주장하는 대로 암호화폐가 증권으로 해석될 경우, 엄격한 법 적용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해당 법안이 초당적으로 발의된 만큼 통과될 가능성이 크다고 기대한다. 해당 법안의 명칭은 ‘책임 있는 금융 혁신 법안(Responsible Financial Innovation Act)’으로 신시아 루미스 미국 와이오밍주(州) 공화당 상원의원과 키어스틴 질리브랜드 뉴욕주 민주당 상원의원이 공동 발의했다.
해당 법안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트코인, 이더리움은 SEC가 아닌 CFTC가 관리하고, 전통 투자자산에 속하는 주식, 채권, 금, 은과 같이 하나의 포트폴리오 상품으로 취급받게 된다. 또한 부수 자산(Ancillary Asset)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SEC와 CFTC 관할 밖에 있는 NFT(Non Fungible Token·대체 불가 토큰) 등도 관리한다는 방침이다.
사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을 상품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미국에서는 증권법 적용 대상인지를 가리기 위해 ‘하위 테스트(Howey Test)’를 사용해 왔는데, 이 두 코인은 이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게 암호화폐 상품론자들의 설명이다.
하위 테스트는 네 가지 요건을 두고 증권성을 판단한다. ① 투자자금(investment of money)이 ② 공동의 사업(common enterprise)에 ③ 타인의 노력으로(derived from the efforts of others) ④ 수익이 창출될 것이라는 합리적 기대(reasonable expectation of profits)가 있을 경우다.
비트코인의 경우, 공개경쟁 채굴을 통해 초기 분배가 이뤄져 기업공개(IPO) 같은 자금조달 과정을 거치지 않기에 ①, ③번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이더리움은 재단의 노력만으로 가치가 상승하는 것으로 볼 수 없어 ③번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주장해왔다.
이번 법안을 발의한 두 상원의원 역시 이와 비슷한 의견을 내놨다. 루미스와 질리브랜드 상원의원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은 상품으로 해석된다며 해당 두 코인은 SEC의 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암호화폐 전문가인 김동환 블리츠랩스 이사는 “CFTC가 이 두 코인을 관리하게 된다면 가상자산 사업자들은 그동안 그들을 괴롭혀 온 규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며 “SEC는 리플, 트론 등에 대해 증권법을 적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지만 CFTC는 보다 부드러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다만 암호화폐를 상품으로 보는 이번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나머지 암호화폐)의 전망은 밝지 않다. 법안이 비트코인, 이더리움과 다르게 대부분의 알트코인의 경우, 증권으로 봐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다. 법안 내용에 따르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외 암호화폐는 그 증권성이 인정된다고 본다. 증권성이 인정되기에 해당 암호화폐들은 SEC 관할권 아래 놓일 뿐만 아니라, 공시 의무까지 지게 된다.
루미스 상원의원은 법안 발의 후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를 통해 “알트코인 대부분이 증권에 해당된다”며 “이는 CFTC, SEC 의견과도 일치한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CFTC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만 관할할 것”이라며 “반면 SEC는 대부분 가상자산에 대한 관할권을 갖게 될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국내 암호화폐 전문 분석 기관들은 미 규제 당국의 기준에 맞는 경쟁력 있는 코인이나 프로젝트만이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 기준 미달인 코인 등은 시장에서 도태될 수 있다고 본다. 오유리 빗썸경제연구소 정책연구팀장은 “대부분의 알트코인이 증권으로 인정될 경우, 알트코인 발행자 및 재단 등은 증권과 유사한 수준의 강한 규제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며 “법적 요구 수준을 충족한 경쟁력 있는 프로젝트만이 생존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알트코인 사이에서도 옥석 가리기가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해당 법안이 통과된다면 많은 알트코인이 사라질 수 있다며 투자에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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