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바뀌어도 기재부는 똑같아..장애인 예산은 그들에게 '낭비'"
“7개월의 시위 끝에 만난 자리에서 들은 답변은 ‘검토하겠다’가 전부입니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전장연 사무실에서 만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는 답답하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서울역에서 기획재정부 복지예산과장과 보건복지부 장애인정책과장을 만났지만 또다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 대표의 예상대로라면 지난달 만난 자리에서 정부와 전장연은 각자 예산안과 요구안을 놓고 이를 어떻게 조율할 지 실무 논의를 진행해야 했다. 그러나 공무원들은 지난 7개월 간 전장연이 수없이 외친 주장을 2시간 동안 한 차례 더 듣고는 “검토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담당 과장은 나오면 ‘새로 와서 잘 모른다’며 ‘설명을 잘 듣겠다’고만 해요. 기재부에 이미 저희 안을 다양한 방법으로 작년부터 여러 차례 전달했어요. 저희가 이제 정부의 의견을 달라고 하면 과장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그 사람은 왜 나왔나요.”
7개월 지하철 투쟁 결과는 ‘예산 증가율 감소’
전장연이 지난해 12월부터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이하 지하철 시위)를 시작하면서 정부에 내건 요구사항은 2023년도 예산안에 장애인 권리 예산을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할 수준까지 반영해달라는 것이었다. 장애인 권리 예산은 장애인의 이동권과 노동권, 탈시설 및 활동지원 권리 등을 확충하는 데 쓰이는 예산으로 국토교통부와 교육부 등 다양한 부처의 사업과 연결돼 있다.
그중에서도 탈시설과 활동지원 등 장애인 정책을 주관하는 복지부 사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전장연은 장애인 탈시설 사업 대상자 확대,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 대상 및 지원시간 확대 등을 위해 장애인 활동지원 예산 1조2000억원 증액을 비롯해 복지부 장애인정책국의 내년도 예산을 대폭 늘려줄 것을 정부에 요구해왔다.
그런데 전장연이 입수한 복지부 내년도 예산안 부처안 자료를 보면 장애인정책국에 할당된 예산은 4조5382억원으로 올해 예산보다 11.1%(4530억원) 오르는 데 그쳤다. 올해 증가율(11.9%)보다도 낮았다. 활동지원 예산은 올해 대비 3200억원 늘어날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정부 예산안은 각 부처가 먼저 부처안을 내면 기재부가 이를 종합하면서 일부 조정 과정을 거쳐 본예산을 발표하는 식으로 짜여진다. 부처 간 조정 과정에서 부처 발 예산안은 더 삭감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박 대표는 “최근 높은 물가 상승률과 최저임금 증액 등을 고려하면 증가율은 더 낮아진다”며 “이럴 거면 대체 우리는 왜 그동안 지하철을 탔느냐”고 말했다.
전장연은 이달 말까지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직접 답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다음달부터 다시 지하철 시위를 이어갈 것이라는 입장이다. 내년도 예산안이 발표되는 시점은 다음달 말쯤이다. 박 대표는 “우리 측 안이 아직 실무적으로 보고도 안됐을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달이라는 충분한 시간을 준 것”이라며 “그 기간 동안 우리 의견을 다시 공개적으로 전달하겠다”라고 말했다.
“검토하겠다” 듣기까지 걸린 시간 ‘15개월’
전장연 측이 기재부에 장애인 권리 예산 반영을 처음 요구한 것은 지난해 3월이다. 처음부터 출근길 지하철을 점거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기재부에 e메일도 보내고 세종시에 있는 기재부 청사 앞에서 농성도 했다. 하지만 담당자를 만나기는커녕 요구안을 전달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박 대표는 “몇년 전 기재부 앞에서 시위를 할 때도 1박2일 밤을 세워 농성을 하니까 마지막에 주무관 한 명이 나와 자료를 받아간 것이 전부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지하철 시위를 시작하고 한달 뒤인 지난 1월, 박 대표는 당시 기재부 복지예산과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담당 과장은 박 대표의 얘기를 들은 뒤 처음에는 주무 부처인 복지부와 얘기해보겠다고 하더니 한달 정도 지난 시점에 박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각 부처에 직접 예산 증액을 요구하라고 통보했다. 박 대표는 “당시는 진보 정권 시기인데도 그랬다”며 “문재인 정권 때나 지금이나 기재부의 태도는 늘 똑같았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예산 뿐 아니라 정책 역시 최종적으로 예산권을 쥐고 있는 기재부에게 결정권이 모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관련 사업을 시행하는 지방자치단체나 각 부처에 가서 얘기하면 이들은 입을 모아 ‘기재부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며 “각 부처는 사실상 꼭두각시인데 꼭두각시랑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오랜 경험 끝에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결국 7개월의 지하철 시위 끝에 정부 책임자를 만나 박 대표가 들은 말은 “검토하겠다”뿐이었다. 지난해 3월부터 보면 요구 사항을 내건 지 15개월 만에 들은 정부 입장이다. 이마저도 “주무 부처에 알아보라”는 1월 당시 기재부 입장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다. 박 대표는 “우리 요구에 만약 문제가 있다면 논의를 통해 요구를 정정할 의향도 있다”며 “일단 서로 논의할 기회라도 먼저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투자 관점에서 장애인 이슈 접근하니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박 대표는 이제 기재부를 넘어 추 부총리가 직접 응답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재부 실무자도 “권한이 없다”며 책임을 돌리니, 최종 책임자인 기재부 장관이 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관 인사 청문회 당시 추 부총리가 직접 “장애인 예산은 확대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 점은 박 대표가 희망을 거는 점이기도 하다. 전장연은 지난 14일 추 부총리의 집을 직접 찾아 면담 요청서를 전달하려는 과정에서 주거침입 혐의로 체포됐다 풀려나기도 했다.
추 부총리는 이를 두고 전날 “뜻은 충분히 알겠으나 예산을 관철하려고 하는 그 방법이 과연 적정한지, 실효성이 있는지 그런 부분에 관해서는 곰곰이 생각해보시면 좋겠다”며 “전반적인 예산 속에서 (요구사항을) 어떻게 투영시킬 수 있는지는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모든 문제를 비용과 편익으로 바라보는 기재부의 시각에서 장애인 이슈는 늘 뒷전이 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박 대표는 “기재부는 장애인을 투자 대비 가치가 높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 예산을 낭비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며 “이 공고한 기재부의 인식 체계 자체가 바뀌지 않으면 장애인 이슈는 앞으로도 계속 뒤로 밀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창준 기자 jch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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