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 사본에 재산 털렸다" 금융업계 비대면 실명 확인에 금융사기 속출
금융사는 "절차대로 했으니 소송해라"
법조계·시민단체 "신기술로 이득 챙긴 금융사가 책임도 강화해야"
직장인 김모(40)씨는 최근 영문도 모른 채 승인된 대출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건의 발단은 김씨의 도난당한 휴대전화에 저장된 신분증 사본이었다. 도난당한 휴대전화 안에 있던 신분증 사본으로 사기범이 카카오뱅크에서 비대면 실명 확인을 통해 대출을 받은 것이다. 신용대출 3620만원과 비상금대출 300만원, 사잇돌대출 2000만원 등 대출사기 피해액만 5920만원에 달했다.
김씨는 즉각적으로 대출이 잘못 실행됐다며 카카오뱅크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돌아온 건 “우리는 절차대로 했으니, 소송을 통해 해결하라”는 대답 뿐이었다. 김씨는 “은행을 새롭게 하는 기술이라더니 대출 장사에 눈이 멀어 허위 개인정보를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은 것”이라며 “심지어 카카오뱅크는 처음엔 실수라고 인정하더니 결국 소송으로 해결하라고 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모바일·인터넷 뱅킹 비대면 금융거래가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금융사의 ‘비대면 실명 확인’을 악용한 대출사기나 무단인출 등 금융 사고가 속출하고 있다. 피해자 사이에선 금융사들이 비대면 금융거래로 소비자를 유치하면서 정작 금융사고에는 제대로 대처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금융사고는 피해액이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달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18일 오전 11시 30분 서울 종로구 경실련 강당에서 ‘신분증 사본인증 피해자 모임’ 등 피해자 단체와 함께 신분증 사본 피해 관련 고발대회를 개최했다. 신분증 사본인증 피해자 모임은 금융사의 비대면 실명 확인으로 인한 대출사기·무단인출 피해를 본 270여명이 올해 초 결성한 단체다.
경실련에 따르면 금융업계 전기통신금융사고는 지난해 2만5859건이 발생해, 피해액은 총 2353억원에 달했다. 올해 상반기에만 벌써 총 845억원 규모에 달하는 1만4065건의 전기통신금융사고가 발생했다. 은행별로 전기통신금융사기 사고금액을 살펴보면 2012년부터 2021년 상반기까지 국민은행(3645억원)이 가장 많았고, 신한은행(3442억원)이 그 뒤를 이었다.
비대면 실명 인증을 통한 금융사기는 총 4단계의 과정을 거쳐 발생한다. 우선, 스미싱·피싱·해킹이나 휴대전화 도난 등으로 피해자의 신분증 사본이 유출된다. 이후 비대면을 통한 대포폰 개통과 대포통장 개설 등으로 개인 정보가 도용된 휴대전화와 통장이 만들어진다. 범죄집단은 앞선 방식으로 만들어진 휴대전화와 통장을 이용해 대출이나 무단인출을 하는 것이다.
비대면 실명 인증으로 1억5000만원 예금이 계좌에서 빠져나간 사례도 있다. 신한은행을 이용하고 있던 또 다른 피해자 박모(51)씨는 메신저 피싱을 통해 주민등록증 사본과 계좌 비밀번호가 유출됐다. 가해자는 메신저 피싱으로 얻은 개인정보로 비대면 실명 확인을 진행해 모바일뱅킹 간편 비밀번호와 OTP를 발급받았다. 이후 몇 시간 만에 총 34곳의 다른 계좌로 1억5000만원이 송금됐다.
피해자들은 신분증 사본 사진을 다시 한 번 촬영한 ‘2차 사본’으로도 은행에서 대출안 거액의 송금이 실행되고 있는 점이 금융실명제에 크게 위반된다고 강조했다.
박정경 신분증사본인증피해자모임 대표는 “비대면 실명 확인은 단순히 신분증을 확인하는 절차가 아니라, 본인을 확인하는 과정”이라며 “비대면 인증 절차와 관련된 금융위원회 가이드라인에서는 원본을 촬영한 ‘1차 사본’만 허용하고 있고 사본을 촬영한 ‘2차 사본’은 전혀 허용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인건비 절감을 위해 실명 확인을 심사하는 인원이나 시스템을 마련해 놓지 않아 금융소비자만 피해를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법조계는 금융업계의 비대면 실명 확인 절차에 대해 위법 소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김호윤 변호사는 “금융실명이란 신분증의 사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를 확인하는 것”이라며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 이득을 본 건 금융사지, 금융소비자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비대면 실명 확인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면서 위험성보다는 기술력에 집중하다 보니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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