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그래도 힘든데"..강달러에 신음하는 세계 경제
개도국 부채 상환 부담, 기업들 환차손 규모 커져
강달러 현상 당분간 이어질 듯..경제 침체가 변수
글로벌 외환거래의 90%를 차지하는 달러 가치가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하면서 세계 경제가 신음하고 있다.
부채가 많은 저개발 국가들은 원금 상환 부담이 커지면서 부도 위기에 직면했고, 수출로 돈을 벌어 달러로 환전해야 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이익이 감소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안 그래도 고물가에 고통받는 세계 경제가, '강달러' 현상의 부작용까지 겪으며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 달러지수 108.06 기록...20년 만에 처음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주요 6개국(유럽연합·일본·영국·캐나다·스웨덴·스위스) 통화 대비 미국 달러의 가치를 나타내는 '미국 달러 지수(달러인덱스)'는 이날 108.06을 기록했다. 달러인덱스가 108선을 돌파한 건 2002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올해 초와 비교해서도 10% 넘게 급등했다.
달러 강세로 주요 국가들의 통화 가치는 곤두박질쳤다. 일본 엔화의 달러 대비 가치는 2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유로화 가치도 폭락해 달러와 유로가 등가로 교환되는 '패리티'가 무너졌다. 유로 출범 후 유로화 가치가 달러보다 낮아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달러가 ‘나홀로 강세’를 띠는 건 미국의 빠른 기준금리 인상으로 달러 가치의 평가가 빠르게 절상돼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2020년 3월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기준금리를 ‘제로(0)’로 낮춘 뒤 2년 만인 올 3월 제로 금리에서 벗어났다. 두 달 뒤엔 5월 금리를 0.5%포인트 올렸고 지난달에는 28년 만에 처음으로 0.75%포인트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그 결과 미국의 기준금리는 단 석 달 만에 제로 금리에서 연 1.5~1.75%로 급등했다. 주요 7개국(G7) 중 가장 높은 금리 수준이다. 반면 유럽연합(EU)과 일본은 현재 각각 제로 금리와 마이너스 금리에 머물고 있다. 결국 고금리를 좇아 세계 각국의 유동자금이 달러로 교환돼 미국으로 흘러가면서,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달러의 가치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달러 강세에 개발도상국들 빚 눈덩이...글로벌 기업들도 타격
이례적인 달러 강세 현상으로 세계 경제엔 여러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해외에서 돈을 빌린 정부나 기업의 부채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고 있다. 달러로 돈을 갚아야 하므로, 빚 규모 자체가 늘지 않았어도 갚아야 하는 이자나 원리금은 환율 상승 폭만큼 늘어난다.
510억 달러의 국가 채무를 안고 있던 스리랑카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것도 '강달러' 현상이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NYT는 “선진국보다는 달러 부채가 많은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피해가 커지고 있다”며 “달러 대비 자국 통화 가치가 현재 빠르게 하락하는 아르헨티나와 터키도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글로벌 기업들의 타격도 적지 않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달러로 바꾸면서 그만큼 환차손을 입어서다. 전체 매출의 6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는 애플 역시 강달러에 따른 환차손 피해를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역시 해외 매출 비중이 높은 마이크로소프트와 나이키는 실적 전망치를 아예 낮춰 잡았다.
글로벌 투자업체 이토르의 벤 레이들러 시장 전문가는 “달러 가치 상승으로 미국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지수에 포함된 기업들의 이익 성장률이 5%(1,000억 달러) 감소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해도 달러 수요 늘어..."연준이 내년 기준금리 인하할 수도"
전문가들은 달러 강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연준이 금리 인상을 지속하는 가운데 에너지난과 일본의 엔저 유지, 중국의 봉쇄 조치 등에 따라 안전자산인 달러에 대한 수요는 계속 높아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달러 가치 급등으로 세계 경제 기반이 뒤틀리면서 개도국과 글로벌 기업 등이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도 그만큼 길어질 수밖에 없다.
다만 글로벌 경제가 본격적인 침체 국면에 빠지면, 오히려 달러 강세 현상이 완화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마크 헤펠레 UBS 글로벌자산운용 투자책임자(CIO)는 “미국 경제성장이 둔화하면 내년에는 연준이 기준금리 인하로 돌아설 수 있어 달러의 추가 상승을 제한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현우 기자 777hyunw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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