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조건 대물림되는 사회 '공정성'에 던지는 물음표"

이강은 2022. 7. 17. 19:4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연극 '웰킨' 주연 하지은&'편입생' 연출 윤혜숙
'웰킨' 18세기 영국배경 여성인물 서사
아동살해 사형수 임신 주장 놓고 공방
배심원들 계급·법·성별 등 모순 꼬집어
'편입생' 교육 시스템 공정성 다룬 사회극
뉴욕 빈민촌 두 인재 명문대 편입 놓고
시민단체·면접관 치열하게 설전 인상적
연극 ‘웰킨’의 한 장면
두산아트센터가 올해 ‘두산인문극장’ 주제로 정한 ‘공정’ 관련 연극이 호평 일색이다. 연극 3편 중 마지막 작품인 ‘편입생’(7월5∼23일)이 공연 중인데, 지난달 끝난 두 번째 작품 ‘웰킨’에 이어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웰킨’은 ‘차이메리카’로 로런스 올리비에상(연극, 무용, 뮤지컬 등을 대상으로 한 영국 최고 권위의 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극작가 루시 커크우드의 신작이다. 1759년 영국의 한 마을, 나이·출신·인종·계급이 다른 여성 12명이 아동을 살해한 여성 사형수의 임신 진위를 판별하기 위한 배심원으로 법정 위층 다락방에 모인다. 임신이 맞으면 사형을 면하고 추방된다. 배심원들이 논쟁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종교·법·성별 등과 관련한 모순과 공정성이 도마에 오른다. 배우가 15명이나 되고 러닝타임도 3시간에 달하지만 주·조연 할 것 없이 모든 캐릭터가 돋보이도록 짜임새가 촘촘해 지루할 틈이 없다.

‘편입생’은 미국 극작가 루시 서버 작품으로 교육 시스템의 공정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업 기회에 따라 사회적·경제적 지위와 권력이 주어지는 현대사회에서 학업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정한지,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자격 기준은 공정한지를 들여다본다. 뉴욕 빈민촌에서 자란 두 학생을 지역 인재로 추천해 명문대에 편입시키려는 시민단체 관계자와 선발권을 지닌 해당 대학 면접관이 ‘입학 자격 기준’을 놓고 치열하게 설전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웰킨’ 주인공(엘리자베스 루크)을 맡은 하지은(39)과 ‘편입생’ 연출을 맡은 윤혜숙(38)에게 각 작품 의미와 메시지 등을 더 들어봤다. 하지은 배우는 이 작품을 직접 찾아 2020년 낭독공연을 한 뒤 이번 무대에 올리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 윤혜숙 연출은 검열, 공정, 안전 등 동시대 사회 이슈에 주목하고 있는 창작자로 2020년 제11회 두산연강예술상을 받았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에서 하지은을 만나 인터뷰했고, 윤 연출은 개인적 사정이 생겨 서면 인터뷰로 대신했다.
‘웰킨’이 무대로 올라오기까지 큰 역할을 한 배우 하지은이 지난 13일 인터뷰에서 “웰킨은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허정호 선임기자
‘웰킨’ 국내 초연 과정이 흥미로운데, 시작과 끝에 하지은이 있다. 여성을 다룬 서사에 갈증을 느끼고 국내외 극단과 작가의 작품을 찾아보던 그는 2년 전 ‘우연히’ 사진 한 장에 눈길이 갔다. 영국 국립극장에 걸린 사진인데 여성 배우 10여명이 줄지어 서 있는 ‘웰킨’의 한 장면이었다.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이 작품 뭐지?’하고 아마존에 검색해보니 E-Book(전자책)이 있더라고요. 18세기 배경이라 고어도 많은 작품을 영어 단어 찾아가며 밤새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바로 극단 ‘씨어터 송’ 대표이자 ‘웰킨’에서 엠마 젠킨스 역할을 맡은 선배 송인성을 찾아갔다. “선배님께 ‘코로나19 탓에 다들 공연도 취소돼 쉬고 있으니 희곡 읽기 모임이라도 하시죠’라고 농담 삼아 ‘이 작품(웰킨) 사주세요’ 했더니 ‘네가 해봐’ 그러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뛰어들었죠).”

사실 제대로 된 ‘웰킨’ 번역본을 읽고자 작품을 사고 싶었던 하지은은 끙끙대며 공연 지원기획서를 만들어 타낸 지원금으로 그해 낭독공연까지 성공적으로 마쳤다. 마침 같은 작가의 ‘차이메리카’(2015)를 올린 바 있는 두산아트센터도 ‘웰킨’ 낭독공연에 관심을 보였고, 올해 ‘공정’ 시리즈 연극 무대에 올렸다.

극에서 법정 밖 군중들은 살인자 샐리에 대한 교수형 집행을 부르짖고, 여성 배심원 상당수도 샐리의 임신 주장은 거짓이라고 서둘러 결론 내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필사적으로 샐리를 엄호한다. 논리정연한 설득력과 마을 산파로서의 경험, 신뢰까지 동원해 불합리한 사회 구조에 여성들이 무작정 순응해선 안 된다고 호소한다. 그러나 샐리의 생모였다는 사실 하나로, 그도 피해자였지만 삶 자체가 모두 부정당한다. 하지은은 “엘리자베스는 모성애보다도 남성들이 마녀재판처럼 법을 집행하는 사회, 누구든지 제물이 되기를 바라는 군중심리의 문제점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 호소한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어 “어차피 임신 진위를 판별하기 힘든 상황에서, 샐리가 가난과 폭력 등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아온 걸 안 데다 비슷한 시절을 보낸 여성들이 동정심을 발휘해 목숨만은 살려주자는 마음이 컸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웰킨’에 대해 ‘집안일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했다. “집안일은 정말 힘든데 티도 안 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잖아요. 사회·여가생활도 포기해야 되고. 웰킨의 뜻이 ‘창공’인데 하늘 한번 편하게 올려다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이를 동시대로 확장하면 보이지 않거나 낮은 곳에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사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죠. 극 중 여성들이 배심원을 한 날은 집안일에서 벗어나 하늘을 올려다보고 생각하면서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는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은은 ‘웰킨’이 다시 관객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하며 배역별 의상 전부를 깨끗이 다려 보관해뒀다고 한다.
‘편입생’ 윤혜숙 연출은 “선천적 삶의 조건이 교육의 질에 이어 일자리 질을 결정해서 결국 선천적 삶의 조건이 대물림되는 사회 구조가 바뀔 날이 올 수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윤 연출은 먼저 ‘편입생’이 상류층의 입시비리를 소재로 하지 않은 점이 좋았다고 했다. “현실에서도 비일비재한 상류층 입시비리 사건은 우리를 분노하게 하지만 그 감정은 금방 뜨거웠다가 사라져버려 생각이 머무를 자리가 없잖아요. 비난받아 마땅한 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하고 공연이 끝난다면 허무할 것 같았습니다. 대신 극을 통해 생각과 질문이 꼬리를 물고, (관객이) 목격한 인물들의 삶에서 먹먹함을 느끼고, (마음도) 움직이길 바랐습니다.”

우리 시대 교육이 한 사람의 ‘성장’이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잃어버리고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고 한 그는 연출 과정에서 ‘선인’과 ‘악인’의 대결 구도가 되지 않도록 하는 데 가장 신경 썼다고 한다.

“정의로운 사람이 부도덕한 개인이나 사회에 일방적으로 호소하지 않도록, 어느 한쪽의 입장만 설득력 있게 다가가지 않도록 노력했어요. 그러면서도 애당초 동등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두 개인의 논쟁이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연극 ‘편입생‘의 한 장면
극 중 명문 헤럴대학 면접관 조지아 교수는 ‘선발권’이 있지만, 가난·폭력·범죄 등이 만연한 환경에서도 바르게 자라고 잠재력 있는 클라런스와 크리스토퍼를 추천한 데이비드의 경우 선발권이 없어 논쟁 자체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조지아 교수가 악인이어서 관객이 미워하는 게 아니라 결국 자신 뜻대로 상황을 종결할 수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여유, 그 여유라는 거대한 장벽의 견고함이 관객들에게 전달됐으면 했어요. 그리고 그 견고한 벽 앞에서 근거를 제시해 설득하거나 (때론) 감정에 호소하고 울분을 토하다 좌절하고 마는 데이비드 모습에서 (우리가) 평소 무수히 마주하는 수많은 데이비드가 겹쳐 보이길 바랐습니다.“

‘편입생’ 마지막 장면에서 대학에 떨어진 클라런스와 입학한 크리스토퍼가 만나 “괜찮아”, “우린 괜찮을 거야”라며 서로 바라본다. 윤 연출은 “관객에겐 들리지 않지만, 그때 둘은 눈빛으로 ‘Good luck(to you·행운을 빌게)’라고 한다”며 “그들의 삶에 행운이 따를지 모르겠지만, 이 편입생 선발이 그들에게 온 ‘유일한’ 기회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긴 한 마디. “선천적 삶의 조건이 교육 질을 결정하고, 교육 질이 일자리 질을 결정해서 결국 선천적 삶의 조건이 대물림되는 구조. 이런 사회 구조 안에서 ‘저렇게 되기 싫으면 공부해! 억울하면 공부해서 성공해!’라고 하는, 우리가 이것보다 더 나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