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명성황후 혼례 때 어떤 비녀 썼나?

신효령 2022. 7. 17.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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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이 7월의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 때 사용한 비녀 목록을 적은 기록'을 선정했다.

이상백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기록은 당시 왕실에서 행해졌던 의식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며 "고종, 명성황후 혼례에 대해서는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가 현존하고 있으나 발기의 목록과 같이 구체적인 사항은 의궤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기록물은 짧은 목록이지만 당시 의식에 소요된 물품들을 아주 상세하게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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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국립고궁박물관 7월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

[서울=뉴시스] '보잠발기'.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022.07.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신효령 기자 = 국립고궁박물관이 7월의 큐레이터 추천 왕실 유물로 '고종과 명성황후의 혼례 때 사용한 비녀 목록을 적은 기록'을 선정했다.

이상백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이 기록은 당시 왕실에서 행해졌던 의식의 구체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며 "고종, 명성황후 혼례에 대해서는 '고종명성황후가례도감의궤'가 현존하고 있으나 발기의 목록과 같이 구체적인 사항은 의궤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이러한 기록물은 짧은 목록이지만 당시 의식에 소요된 물품들을 아주 상세하게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고 말했다.

이 기록물의 표지에는 '보잠발기'(寶簪件記)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보잠'은 보배로운 비녀를 의미하며, '발기'는 주로 왕실 의례에 쓰이는 물품 등을 작성한 목록이다. 한자로는 각 건(件)에 대한 기록이라는 의미에서 '건기'(件記)라고 표기하는데, '건(件)'은 우리 옛말로 'ᄇᆞᆯ'로 불러 '발기'라고도 했다.

한글로 작성된 이 기록물은 두툼한 붉은색 종이를 아코디언 식으로 접어만들었다. 표지는 직물로 만들어 기록물의 품격을 높였다. 비단, 삼베 등 직물을 이용해 제작한 표지는 품격있는 왕실 기록물에서 자주 보이는 형태다.

기록물에는 가지런히 작성한 비녀 목록이 확인된다. 목록을 고르게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종이의 표면에 미리 해둔 각종 표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부에 기준점이 되는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아래 세로로 홈을 낸 칸을 마련해 흐트러짐 없이 글을 쓸 수 있게 했다.

[서울=뉴시스] '보잠발기'.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022.07.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비녀는 큰머리와 조짐머리 장식으로 나눠 작성했다. 큰머리는 국가의 가장 큰 의례를 행할 때 입는 대례복에 갖추는 머리 모양이며, 조짐머리는 궁중 머리 모양 중 가장 약식의 머리 모양이다.

기록물에 별도로 부착된 작은 쪽지인 첨지를 통해 작성 시기와 배경을 파악할 수 있다. 부착된 종이에는 병인년 가례 때로 시기가 적혀있다. 즉 1866년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왕실 가족의 혼례)에 쓰였던 비녀다. 그 내용에 따르면 처음에 도착하지 않았던 비녀를 다시 마련하면서 목록이 작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이상백 연구사는 "조선왕조실록, 의궤 등을 살펴보면 당시 업무상에 다양한 실수·착오가 확인된다"며 "따라서 예식을 치르는데 소요된 물품을 보내는 것에 누락된 것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라 보인다. 다만 첨지로 처음에 도착하지 않았던 비녀를 다시 마련해 보낸다고 부착한 것은 아마도 다른 기록과 구분하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추측하건데 처음 비녀를 보냈을 때의 원래 '보잠발기'가 있었고, 이 '보잠발기'를 다시 보내면서 두 기록물을 구분하기 위해 누군가 그 배경을 작성해 부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상백 연구사는 "조선시대에는 영조 32년(1756)에 시행된 가체금지령이 있었다"며 "당시 가체의 풍속이 사치가 됨을 막기 위해서였는데, 이는 정조대까지 이어진다"며 "다만, 가체금지는 실제로 완전히 지켜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와 같은 글에는 "부귀한 집에는 머리치장에 드는 돈이 무려 7~8만에 이른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민간에서도 여전히 호사스러운 비녀가 사용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용·봉황 등은 왕실을 상징하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으나, 효종 2년(1651) 8월14일 '효종실록'에 "여염의 사대부 집에 사치가 날로 심하여 부녀자가 출입할 때 봉잠(鳳簪)과 용차(龍釵)가 없으면 부끄러워서 감히 나가지 못한다 합니다"라는 글에서 확인하듯이, 용·봉황 등을 민간에서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물은 박물관 왕실의례 전시실에서 만나볼 수 있으며, 국립고궁박물관 누리집 등에서 해설 영상도 볼 수 있다.

[서울=뉴시스] '보잠발기'.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2022.07.17.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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