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중동서 미국 리더십 발휘할 것" 약속..원유 증산, 아랍·이스라엘 안보 협력은 '빈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등 나흘 동안의 중동 순방을 마치고 귀국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후 첫 중동 방문에서 경색됐던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 중국과 러시아, 이란의 중동 지역 내 세력 확장 억제 등을 도모했다. 하지만 고유가에 대응하기 위한 원유 증산,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관계 정상화 등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순방 마지막 일정으로 사우디 제다에서 열린 ‘걸프협력회의(GCC)+3’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그의 정상회의 연설은 이번 순방의 목적을 잘 보여줬다. 그는 “미국은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라면서 미국이 중동에서 능동적인 파트너로 남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미국은 중동 지역을 떠나 이 공간을 중국, 러시아, 이란이 채우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며 “적극적이고 원칙 있는 리더십을 바탕으로 중동 지역 내 기반을 강화할 것”고 말했다.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해 인도·태평양으로 전략적 초점을 이동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에 외교·안보 역량을 집중하는 동안 중국, 러시아, 이란이 중동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회의에서 규칙 기반 국제 질서 준수 국가들과 협력 강화, 호르무즈 해협 등 해상에서 항행의 자유 보호, 중동 지역 긴장 완화, 아랍 국가들과의 정치·경제·안보 협력 강화, 인권과 가치 증진 등 5대 중동 정책 방향을 천명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 식량 위기 완화를 위한 10억달러(약 1조3200억원) 지원 약속도 했다. GCC+3 정상회의는 사우디,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카타르, 바레인, 오만, 쿠웨이트 등 GCC 회원국과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등 3개국 정상이 참석했다.
하지만 GCC+3 정상회의 공동성명은 대체로 모호했고, 이스라엘을 포함한 지역안보 협력 강화 문제에서도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고 로이터통신이 평가했다. 미국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연합 방공망 구축을 추진해 왔지만 파이살 빈 파르한 사우디 외무장관은 이번 회의에서 이스라엘과의 군사 또는 기술 협력에 대해 어떤 논의도 없었다고 선을 그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아랍 국가들의 제재 동참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사실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순방의 하이라이트는 전날 있었던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사우디 해변도시 제다의 알 살람 왕궁에서 무하마드 왕세자와 만나 주먹 인사를 나눈 다음 회담을 했다. 살만 국왕과 악수를 한 것과는 다른 인사 방식이었다.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왕세자를 비난하며 사우디를 국제 사회에서 ‘왕따’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던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그와 인사는 하되 악수를 하는 장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생각해낸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주목한 가운데 오간 주먹 인사는 ‘사우디 왕따 시대’를 끝내기에 충분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지목된 무함마드 왕세자의 정통성을 인정해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와의 회담 뒤 기자회견에서 “카슈끄지 문제는 회담 모두에 제기했으며, 그때와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무함마드 왕세자는 자신에게 책임이 없으며, 책임 있는 이들을 처벌했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그는 미군이 이라크전 당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저지른 포로 학대 사건, 지난 5월 이스라엘군의 서안지구 난민촌 군사작전을 취재하다 총탄에 맞아 숨진 시린 아부 아클레 기자 등을 거론하며 미국도 인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원유 증산에서도 손에 잡히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국제적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충분한 공급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라면서 “에너지 생산업체들은 이미 증산했으며, 향후 수개월 간 벌어질 일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는 이미 최대 생산 능력치인 하루 1300만 배럴까지 증산 계획을 발표했다면서 이를 넘어선 추가 생산은 어렵다고 밝혔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의 산유국이 참가하는 ‘OPEC+3’가 다음 달 3일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회의에서 사우디가 실질적인 증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면 바이든 대통령이 ‘빈손’으로 돌아왔다는 비판 여론이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에런 데이비드 밀러 카네기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은 뉴욕타임스에 “이번 방문으로 왕세자의 지도력이 유효하게 됐고, 미국 대통령의 지위를 일련의 이익과 맞바꿨는데 그 이익의 대부분은 이미 사우디의 것이었다”라고 혹평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감수하고 나섰던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순방은 처음부터 즉각적인 결실을 거두기 어려웠다는 지적도 있다.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차단,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 등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바이든 대통령은 사우디와의 관계에서 ‘장기전’을 벌이고 있는데 반해 무함마드 왕세자는 즉각적인 승리를 거뒀다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벌인 외교적 도박에서 승리했는지는 몇 달 뒤에나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herm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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