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BTS RM도 주목..'로에베 재단 공예상' 한국인 첫 우승 정다혜 작가
[인터뷰] 정다혜 작가
“500년 이어온 ‘말총 공예’ 우수성 인정받아 뿌듯해요”
한올한올 정성스레 짠 바구니 ‘성실의 시간’
전통 재료·기법 활용…빗살무늬토기 본떠
“투명한 빛깔·섬세한 작업 완성도 높다”호평
늘 혼자 작업실서 하루 9시간 작품에 몰두
성심성의껏 제몫 해내는 것 ‘농사와 닮은꼴’
한올 한올 정성스레 짠 바구니가 빛을 받아 반짝인다. 둥근 곡선이 푸근하면서 다소곳하다. 짜임이 빚어낸 그림자마저 작품의 일부인 듯 아름답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한번 더 놀란다. 바구니의 재료는 말총, ‘말의 갈기와 꼬리털’이다.
정다혜 작가(33)가 만든 ‘성실의 시간’은 제주 전통 기법인 말총 공예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공예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로에베 재단 공예상(Loewe Foundation Craft Prize)’에서 올해 우승을 거머쥐었다.
상은 2016년 스페인 패션 브랜드 로에베가 장인기술의 탁월함과 예술성을 기념하고자 마련한 것으로, 매년 전세계 작가와 작품을 대상으로 수여한다.
7월 한달간 서울 종로구 공예박물관에서 정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결선에 오른 작가 30인의 작품이 전시된다. 명성 높은 국제 대회에서 한국인이 처음으로 우승했다는 소식 덕분인지 모처럼 공예 전시회에 인파가 몰리며 관심을 받고 있다. 얼마 전엔 케이팝(K-POP)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도 다녀갔다.
말총 공예는 말총을 실처럼 엮어 갓·망건·탕건을 만드는 작업이다. 역사가 무려 500년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성행했는데 남성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모양으로 바꾸는 단발령이 시행된 후 점차 사라져 지금은 제주에서만 겨우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정 작가가 말총 공예를 접한 건 대학원에 재학할 때다. 지역공예마을 육성사업으로 말총 공예 부문에 지원하면서다. 섬유 공예를 전공한 터라 특성이 비슷한 말총을 잘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출신. 잊힌 제주의 전통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도 느꼈다.
“섬유 예술은 평면의 예술이에요. 말총은 섬유이면서도 입체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의 공예 예술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도 컸고요.”
그는 재료와 기법은 전통의 것을 그대로 차용한다. 과거엔 모자나 작은 장신구를 만들었다면 정 작가는 크기가 크고 곡선으로 된 입체적인 작품을 만든다. 형태는 빗살무늬토기를 본떴다.
“작품을 구상할 때 평소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유물을 자주 보고 연구해요. 오직 사람의 힘으로만 생존하던 시대잖아요. 그때 유물을 보면 강한 힘을 느껴요. 저도 흐물흐물한 섬유인 말총을 손으로 엮어 꼿꼿하게 모양이 잡힌 작품을 탄생시키잖아요. 둘 다 사람의 손과 힘으로 제작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어요.”
정 작가는 선사시대 유물에서 영감을 얻고 조선시대 재료와 기술을 적용해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공예품을 완성한다. 그의 작품에는 수백·수천 년의 시간이 담겨 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심사를 맡은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최고 책임자)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은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현대적으로 표현했다”면서 “재료가 지닌 투명한 빛깔, 무엇보다도 작가의 섬세함으로 작품 완성도가 높다는 점에 감동을 받았다”고 평했다.
이번 수상은 정 작가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는 “500년 이상 우리나라가 지켜온 말총 공예의 우수성을 인정받아 기쁘다”고 소감을 전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었는데 바람을 이룬 것 같다”고 했다.
“한창 작품을 만들 때 고민이 많았어요. 늦은 나이에 작가로서 이룬 게 없는 것 같아 불안했거든요. 당시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말총 공예를 잘 해내는 것뿐이더라고요. 그러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요. 이건 요령이 없어요. 손으로 몇시간씩 같은 자세로 엮는 거예요. 간격이 촘촘하고 일정해야 하는데, 조금만 헐겁게 해도 형태가 금방 무너져요. 한번은 티 안 날만큼 아주 살짝 헐겁게 했는데 바로 망가지더라고요. 그때 배웠어요. 적당히 타협해선 안된다는 걸요.”
작품 제목인 ‘성실의 시간’은 작가로서 그가 견뎌온 시간을 뜻한다.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성심성의껏 몰두한 과정이자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다.
정 작가는 요즘처럼 사람을 많이 만난 적이 없다. 늘 혼자 작업실에 박혀 있었는데 수상 이후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공예 예술에 관심이 쏟아지는 것이 감사하다. 문득문득 설레고 기쁘다. 동시에 너무 들뜨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잡는다. 곧 그를 둘러싼 열기가 가라앉을 것을 알아서다. 그러고 나면 하루에 9시간씩 혼자 책상에 앉아 작업하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무엇을 구상해야 할까’ ‘잘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고민이 다시 이어질 테다. 그러나 두렵진 않다. 성실하고 꾸준히 일하는 것은 정 작가에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삶이다.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농사를 지으셨어요. 시설재배라 비가 와도 쉰 적이 없으세요. 어릴 때부터 그런 부모님을 보고 자라서인지 매일 부지런히 일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어요. 공예는 혼자 하는 일이라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러다가도 금세 정신 차리게 돼요.”
정 작가는 공예가 농사와 닮았다고 했다. 싹을 틔우고 수확하기까지 반드시 정해진 시간을 거쳐야 한다. 하루 만에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건 세상에 없다. 말총 공예도 그렇다. 주어진 시간 동안 묵묵히 제 몫을 해내는 것. 농부가 씨를 뿌리고 땅을 갈아 일년을 살 듯 그는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 ‘성실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지유리 기자, 사진=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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