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퍼레이드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나아가자"

김예리 기자 2022. 7. 16.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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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2019년 이후로 만나지 못했으니까 모두 고립된 느낌이었을 거예요. 와 보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서 살고 있었구나, 다들 '드릉드릉' (시동 걸고) 준비하고 있었구나' 느껴 반가워요.”

16일 열린 서울퀴어퍼레이드를 찾은 하놀 씨(활동명, 25세)가 말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16일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를 열고 4시30분께 서울광장에서 행진을 시작해 약 한 시간 반 도심을 행진한 뒤 다시 서울광장에서 마무리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올해 퀴어퍼레이드 구호를 '살자, 함께하자, 나아가자'로 정했다. 행진 전 환영무대에서 사회를 맡은 퀴어 페미니스트 연극배우 이리는 “우리가 광장에서 만나지 못하는 사이 많은 성소수자 동료들이 세상을 떠났다. 선거철 온갖 혐오 발언들을 마주하면서 이렇게 살아있자고 말하는 것이 가진 울림이 있다”며 “우리는 일상 속에서 어떤 일을 겪든 함께하고, 세상이 멈춰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씩 나아가자”고 구호 뜻을 전했다.

축하공연에 오른 '소수자연대풍물패 장풍'의 지노 씨는 퀴어퍼레이드에 세 번 참여했지만 이번이 첫 '오프라인' 축하무대라고 했다. 그는 “앞서 퀴어퍼레이드 때에 변희수 하사가 돌아가신 뒤 마음이 아팠고, 온라인으로 진행되기도 했기에 활기 있는 공연은 준비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이번엔 사람들이 직접 모이게 됐으니, 함께 모일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나누자는 생각에 화려한 무대를 선보이고 싶어 두 달 준비했다”고 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현장 취재진들에게 프레스카드를 발급하면서 취재 가이드라인을 소개하고 서명을 받았다. 참여자를 취재·촬영하려는 경우 당사자 동의를 얻고, 연락처를 전달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다. 군중은 최대한 멀리서 촬영하고, 한국기자협회의 인권보도준칙 '성적 소수자 인권' 조항에 따라 보도하도록 했다.

조직위는 “아직도 한국사회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심하다”며 “서울퀴어퍼래이드의 참여자나 스태프들도 성정체성과 성적지향이 알려질 경우 폭력적 상황에 노출될 수 있다”고 전했다.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 프레스 천막에서 준비한 취재와 촬영 가이드라인. 사진=김예리 기자

축하무대와 행사부스(천막)가 열리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은 11시부터 참가자들로 꽉 찼다. 행진 1시간 전인 오후 3시께엔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서울광장엔 성소수자 당사자와 앨라이(연대) 단체와 기관, 기업들이 72곳의 부스를 차렸다.

'트랜스해방' 머리띠와 배지 등 후원 물품 부스를 지키던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트랜스해방전선'의 김겨울 대표는 “지난 3년 간 모일 수 없었고, 나를 드러낼 장소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분들이 광장을 찾아와 줘 더욱 기쁘다”고 했다. 그는 “어떤 이들은 퀴어축제를 '음란하다'며 잘못 이해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그 기준으로는 보령 머드축제가 더할 것”이라며 “퀴어 당사자들이 안전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공간”라고 했다.

▲16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하놀씨와 난씨. 사진=김예리 기자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16일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를 열고 4시30분께 서울광장에서 행진을 시작해 약 한 시간 반 도심을 행진한 뒤 다시 서울광장에서 마무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축제에 참가한 하놀 씨(활동명)는 “2014년 청소년일 때 퀴어퍼레이드가 신촌에서 열릴 적부터 참가했다. 처음 왔을 땐 내 편을 찾으려고 찾아왔는데, 당시 노골적인 혐오 세력 앞에서 무섭다고 느꼈었다”며 “성인이 된 뒤 서울광장 퀴어퍼레이드에 와서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고 늘 힘이 됐다”고 했다. 그는 “2019년 이후 현장에서 만나지 못했기에 모두 고립된 느낌이었을 것이다. 오늘 와 보니 사람들도 이렇게 각자 자리에서 살고 있었구나, '드릉드릉' 준비하고 있었구나 느껴 반가웠다”고 했다.

퀴어퍼레이드를 처음 찾았다고 밝힌 난 씨는 “사람들이 정말 많지 않나. 들어오기 전 바깥은 (방해 집회로) 시끄러웠지만 (서울광장에) 들어오니 분위기가 너무 따뜻하다. 오길 잘했다”고 말했다.

▲16일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린 서울광장에 늘어선 행사 부스. 사진=김예리 기자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 공식 굿즈 판매부스. 사진=김예리 기자

12개 국가의 주한 대사관도 부스를 차리고 축사를 했다. 부스를 지키던 주한 핀란드 대사관의 미카 루오트살라이넨 참사관은 “스웨덴과 덴마크, 노르웨이 등 북유럽국가 대사관은 모두 부스에 참석했고 특히 올해는 아이슬란드도 참여했다”고 했다. 그는 “핀란드에서 퀴어퍼레이드는 오랜 전통이고 대규모 행진을 한다. 사나 마린 총리를 비롯해 많은 고위직 정치인들이 참석한다”고 했다.

그 옆에 부스를 세운 태국정부관광청 서울사무소는 2010년부터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해왔다고 밝혔다. 태국관광청 관계자는 “날씨가 안 좋은데도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서 깜짝 놀랐다. 다들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며 “바깥에서 다른 분들이 시끄럽게 집회하는 가운데서도 재미있는 풍경”이라고 했다.

▲23일 서울퀴어퍼레이드가 열린 서울광장 내 태국정부관광청 부스. 사진=김예리 기자

주최 측은 광장을 채운 청중들에게 대형 현수막을 드리우고 인파가 손 들어 이를 받쳐올리는 세리머니를 진행했다. 소수자연대풍물패 장풍과 미미시스터즈, 빌리카터, 호레이, �꼰�M즈, 라이오네시스 등이 축하 무대를 꾸몄다.

4시30분께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으나 퀴어퍼레이드가 시작되면서 참가 열기가 더 뜨거워졌다. 서울광장에서 출발한 행진은 을지로입구역과 종로1가와 종로2가를 거쳐 을지로 2가, 명동역을 거쳐 서울광장으로 돌아와 마무리됐다.

조직위는 인사말을 통해 “뜨거운 열기가 넘치는 현장에서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한 여정에 부족한 예산, 부당하고 차별적인 행정 등 수많은 난관들과 싸워야 했다.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어려움이 있다 하여 우리의 현장은 포기할 수 없고 자긍심 역시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16일 빗속에서 행진 중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16일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를 열고 4시30분께 서울광장에서 행진을 시작해 약 한 시간 반 도심을 행진한 뒤 다시 서울광장에서 마무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서울퀴어퍼레이드 참가자들이 16일 빗속에서 행진 중이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16일 23회 서울퀴어퍼레이드를 열고 4시30분께 서울광장에서 행진을 시작해 약 한 시간 반 도심을 행진한 뒤 다시 서울광장에서 마무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앞서 서울시는 주최 측의 퀴어퍼레이드를 열기 위한 서울광장 사용 허가 요구에 '과다노출을 하지 않을 것'을 조건으로 걸고 부분 허용 조치해 차별행정 비판을 받았다. 이날 성소수자 혐오 극우단체가 서울광장 인근 프레스센터부터 대한문까지 이어지는 퀴어퍼레이드 방해 집회를 열기도 했다.

한편 퀴어퍼레이드 주최를 앞두고 초국 제약회사 길리어드사이언스 코리아가 행진차량 중 하나로 선정돼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와 성소수자 인권 단체들이 우려 성명을 표하기도 했다. 길리어드는 에이즈예방약(트루바다)을 독점 생산하고 고가에 판매해 폭리를 취하면서 성소수자·보건의료 운동계의 비판을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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