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4시간 택배일..휴가 달라 했더니 15만원 내라네요 [씨네프레소]

박창영 2022. 7. 16. 19: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주의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씨네프레소-40] 영화 '미안해요, 리키'

"그녀의 장례식을 민영화하자. 경쟁입찰에 부쳐 최저가에 낙찰시키자."

2013년 마거릿 대처의 죽음으로 많은 영국인이 슬픔에 빠진 가운데 한 남자가 트위터에 이같이 올렸다. 대처가 비용 감축과 효율성 제고를 목표로 다수 공기업의 민영화 작업에 집중했던 것을 비판한 트윗이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켄 로치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받은 영국의 영화감독이다. 노동 계급과 빈민층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리며 '블루칼라의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회 공공성 회복을 이야기해온 그의 입장에서 민영화, 억압적 노동정책, 기업 감세로 영국에 신자유주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대처는 추모만 하기엔 복잡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인물이었던 것이다.

`미안해요, 리키`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택배기사 리키의 삶을 그린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오늘 소개할 그의 영화 '미안해요 리키'(2019)는 택배 노동자 이야기를 담았다. 택배의 대형화와 첨단화를 통해 현대인은 편리한 일상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그 편리함을 만들어내는 핵심 축인 택배 노동자는 잇달아 과로사하고 자살하며 괴로워하고 있다. 남이 강요한 일도 아니고 본인들이 선택한 직업이니 그 정도 고통은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리키는 상사와 동료 스트레스 없이 개인 사업자로 일하고 싶어 택배 기사가 되기로 결심한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내 사업 하고 싶어" 리키, 택배일을 시작하다

영화는 배수공사, 굴착, 배관 작업, 무덤 파기 등 안 해본 일이 없는 리키의 이야기다. 그는 어느 직장에나 존재하는 '짜증나게 하는 상사'를 만나고 싶지 않아 새 직업으로 택배 일을 선택했다. 택배 기사는 개인사업자로서 남의 지시를 받지 않고, 어느 정도 본인 뜻대로 일정을 조율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택배회사 사장은 리키에게 "당신이 나에게 고용되는 게 아니라 서로 파트너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키는 그와 일하는 동안 그 어느 직장에서도 보지 못한 불합리한 근로조건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면접 자리에서 택배 회사 사장도 리키에게 그렇게 말한다. "고용되는 게 아니라 합류하는 거예요. 우린 '승선'이라고 하죠. 당신은 우릴 위해서 일 하는 게 아니라 우리랑 함께 일하는 거예요. 고용 계약도 목표 실적 같은 것도 없죠. 배송 기준만 지키면 돼요. 서명하면 개인 사업자 가맹주가 됩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이죠."
운명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리키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택배 업무에 자아를 상실하는 듯한 경험을 한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돈을 빨리 모으고 싶었던 리키는 회사에서 차를 빌리는 대신 1만4000파운드(2192만원)란 거금을 들여 밴을 구입하게 된다. 초반엔 빽빽한 배송 일정에 지쳤지만 특유의 성실성과 작업 수완으로 지점에서 인정받는 기사가 된다. 어느 날 한 기사가 불성실하다는 이유로 자기 노선을 빼앗기자 리키는 그 기사의 노선까지 담당하게 된다. 성실하게 하루 14시간씩 주6일 일하면 자기 집을 구입할 수 있게 될 것이란 꿈을 꾸게 된다.
인간은 하루 14시간 주6일 근무를 얼마나 오래 견뎌낼 수 있을까.<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휴가 내고 싶어요" "대체 기사 구하면 마음껏 쉴 수 있어"

그러나 사춘기 아들은 그가 하루 14시간 주6일 근무하는 데 발목을 잡는다. 제도권에 강한 불만을 가진 아들은 학교에서 정학 처분을 받아 부모의 근심을 키운다. 급기야 물건을 훔쳐서 자칫하면 기소당할 상황이 돼 아버지가 근무 도중 경찰서로 달려가게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 얘기하는 아버지의 말을 끊고 아들은 삐딱하게 묻는다. "아빠처럼 돼? 내가 그걸 원할까? 주어진 게 아니라 아빠가 선택한 삶이잖아."
리키의 아들은 제도권에 강한 불만을 갖는다. 대형 마트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아들뿐 아니라 딸, 부인까지 점점 지쳐가는 것을 본 리키는 지금이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단 사흘만이라도 휴가를 달라고 택배사 지점장에게 요청한다. "왜 나한테 물어봐? 대체 기사 구하면 아무 문제 없잖아. 자네 사업이잖아, 안 그래? 지난주에 드라이버 넷이 찾아왔어. 그중 하나는 딸이 자살을 시도했지. 가정이란 언젠가는 문제가 생기게 돼 있어. 하루에 100파운드 낼 거면 쉬어."
리키가 원했던 것은 가족과 보내는 단란한 시간이다. 그러나 하루 14시간 주6일 근무를 하는 그에겐 좀처럼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가족을 위한 시간을 잠시도 낼 수 없게 된 아버지

영화는 택배기사를 자영업자로 분류하는 건 일종의 기만이라고 지적하는 듯하다. 실제로 지점장은 택배기사들에게 빨리 움직이라고 채근하고, 근무 시간 중엔 옆자리에 가족을 태우지 말 것을 지시한다. '정확 배송' 시간을 못 지킨 기사에겐 불이익을 주고, 수익성이 높은 노선을 두고 기사들끼리 경쟁하게 만들어 업무 성과를 높인다. 자신은 기사의 파트너라고 주장하지만 엄연히 택배기사의 상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택배회사 사장은 기사들끼리 경쟁을 유도한다. 정해진 택배 업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언제든 옆의 기사에게 일감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한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하지만 애초에 사업자로 등록됐기 때문에 고용 계약 안에서 온전히 보호받지 못한다. 부당한 처우에 반발해 관두는 것도 쉽지 않다. 리키의 경우 애초 밴을 사기 위해 큰돈을 지출한 데다가 가정 문제로 중간에 몇 차례 배송 지연을 일으키며 벌금이 쌓여 일을 그만두는 순간 빚더미에 시달리게 된다. 지점장이 '승선'하라고 했던 이 배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내리려면 거대한 부상을 입을 것을 감수하고 바다로 뛰어내려야 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날엔 딸과 함께 배송 업무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고객 중 한 명이 회사에 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리키는 지점장에게 지적 받게 된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택배노동자가 감내하는 불합리한 근로조건, 외면해도 괜찮은 걸까

영화는 리키를 마냥 선한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사춘기 아들이 일탈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훈육과 폭력의 경계를 자주 넘나든다. 그는 종종 지나칠 정도로 흥분하며, 신속한 배송을 위해 때때로 도로규칙도 위반한다.
켄 로치는 한국에서도 씨네필을 중심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감독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극장에서 10만에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대부분의 관객과 마찬가지로 그는 어느 순간엔 선하고, 어느 순간엔 악하기도 한 평범한 인간인 것이다. 그를 마냥 착한 사람으로 그리지 않은 건 연출자의 의도일 수 있다. 합리적인 근로조건의 필요성을 말하는 영화의 메시지가 캐릭터의 선악에 가리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간병인인 그의 아내는 자신이 돌보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한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즉, 리키에게 합리적인 근로조건이 필요한 이유는 그가 특별히 선한 인간이어서가 아닌 것이다. 감독은 우리와 똑같이 때때로 선하고, 때때로 악한 입체적인 인간인 리키의 일상을 따라가며 묻는다.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단 욕망을 지닌 평범한 인간인 리키가 이 같은 대우를 받아도 괜찮은가. 단지 그가 이 직업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출구가 없이 점점 가혹해지는 근로조건을 견뎌내야 하는가. 장시간 일하면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그가 어떤 혹사를 당해도 불평해선 안 되는 이유가 되는가.'
영화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다.<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영화엔 이런 부조리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지 않다. 차츰 고조되던 감정이 일시에 해소되는 카타르시스가 없기에 일부 관객은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란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감독은 정답을 제시하는 대신, 그저 이 시대에 우리가 가장 자주 마주칠 타 업종의 근로자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보다 편리한 삶을 누리기 위해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불합리는 어디까지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미안해요, 리키` 포스터.<사진 제공=영화사 진진>

장르: 드라마
감독: 켄 로치
출연: 크리스 히친, 데비 허니우드, 리스 스톤
평점: 왓챠피디아(4.1/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87%) 팝콘지수(82%)
※2022년 7월 15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 왓챠, U+모바일tv

[씨네프레소 지난 회차]
17회-"이상형 아내, 밥 먹는 소리 거슬려 이혼 충동"…'팬텀 스레드'
23회-"내 아들은 괴물이다, 버려야겠다"…'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27회-성인 배우도 연애할 땐 썸부터 탄다…'러브 액츄얼리'
29회-"여제자 스타로 키웠더니, 날 떠난다네요"…'밀리언 달러 베이비'
30회-날 구해준 아저씨, 엄마 망친 마약상이었다…'문라이트'
32회-날 위로하던 스승, 뒤에선 애인과 나 갈라놔…'시네마 천국'
36회-"못 걷는 내가 부러워? 그럼 너도 다리 잘라"…'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39회-남친이 제 얘기로 19금 칼럼을 썼습니다 … '연애 빠진 로맨스'와 '비열한 거리'

[박창영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