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도 뚫지 못한 숲, 잠시 비 내려도 금세 푸릇해져

한겨레 2022. 7. 16.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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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동의 서울의 숲과 나무 (54) 한강 둔치와 섬에 있는 숲길을 거닐며
뚝섬한강공원 편백나무숲.

한강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한강 둔치와 섬 길에 채 마르지 않은 진흙이 남아 있었다. 풀밭, 꽃잎, 풀잎에 맺힌 이슬이 영롱했다. 벌·나비가 앉아 꿀을 빨고 목을 축인다. 떨어진 열매를 쪼아 새끼들 입에 넣어주는 어미 새를 보았고, 격 없이 깊어 보이는 할아버지와 손자를 감싸주는 건 바람에 낭창거리는 수양버들이었다. 잠깐 장마가 멈춘 사이 한강 둔치와 섬에 있는 숲길을 거닐었다.

히말라야삼나무 아래 새들의 식사시간

장마가 잠시 멈춘 사이 한강 둔치와 섬에 있는 숲으로 갔다. 그중 한 곳이 뚝섬한강공원이었다.

한강에서 수영하고 물놀이를 즐기며 놀던 시절 뚝섬 백사장은 여름이면 사람들로 넘쳐났다. 백사장은 사라졌지만 뚝섬한강공원 야외수영장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한강을 건너 뚝섬유원지역으로 들어서는 지하철에서 그 풍경을 보았다.

뚝섬유원지역 2번 출구로 나와 수영장을 지난다. 배의 형상으로 지었다는 잠실종합운동장이 한강으로 진수하는 커다란 배로 보인다. 장마 때문에 한강은 흙탕물이다. 오전 10시, 벌써 폭염이다. 뙤약볕에 물비린내가 진하다.

뚝섬 한강 백사장에서 노는 사람들. 뚝섬한강공원 안내판에 붙어 있는 옛 사진.

뚝섬한강공원으로 발길을 인도한 주인공, 편백나무숲이 가까워진다. 강가에 만든 5천㎡의 편백나무숲이다. 숲속에 자리 잡고 앉은 사람들이 보인다. 폭염은 숲 그늘을 침범하지 못했다. 숲에 앉아 숲 밖 한강을 보는 사람들은 요샛말로 ‘멍때리기’에 열중이었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지만, 숲처럼 소곤댔다.

편백나무숲을 뒤로하고 자연학습장으로 들어서는 발길을 반기는 건 작은 소나무군락이었다. 그곳에 열댓 명이 모여 누군가의 동작을 따라 한다. 춤도 아니고 요가도 아닌 것 같은데, 지긋한 나이의 사람들 얼굴과 몸짓에 생기가 돈다.

새끼 입에 먹이를 넣어주는 어미 새.

소나무, 보리수나무, 독일가문비나무, 화살나무, 매화나무가 모여 자라는 숲에 커다란 히말라야삼나무가 눈에 띈다. 그 숲을 이리저리 거니는 사이 새들이 숲으로 날아든다. 새들이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히말라야삼나무 아래 몇 마리 새가 앉아 있었다. 땅에 떨어진 열매를 쪼는 건 어미였다. 새끼 두 마리가 그 옆에서 입을 벌리고 어미를 바라본다. 어미는 열매를 쪼아 조각 내어 새끼들 입에 넣어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모습을 보는 동안 어미는 제 입으로 열매 조각 하나 넘기지 않았다. 편백나무숲을 찾아왔다가 우연히 보게 된 어미 새와 새끼 새의 모습에 폭염도 흐뭇했다. 참새 한 마리 그 옆에 날아와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본다. 서로 쫓지 않는다.

숲은 칠엽수와 산수유나무, 살구나무, 청단풍도 품었다. 청단풍 나무가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단풍나무숲길로 접어들 무렵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둘러 자리를 뜬 단풍나무숲에는 비와 새들만 남았다.

꽃나비 풀꽃처럼

뚝섬한강공원을 지난 한강 물이 굽이쳐 흘러 동호대교 남단에서 잠원한강공원을 만난다. 그곳에 이름도 예쁜 꿀벌숲이 있다.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고등학교와 신사중학교 사잇길로 접어들어 가다보면 한강 둔치로 드나드는 굴다리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 한강 둔치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걷다보면 잠원한강공원 꿀벌숲이 나온다.

잠원한강공원 꿀벌숲 둘레에 심은 나무가 담벼락 구실을 한다. 숲을 드나드는 좁은 통로로 한강 밖 풍경이 보 인다. 꿀벌숲은 아늑하다.

운동하는 사람들 품은 뚝섬 앞의 숲들
비 오자 사람들 떠나고 새들만 머문다
풀잎에 매달린 이슬, 해 담아 영롱하니
비 갠 뒤 흙탕 남아도 숲은 다시 푸르다

장마가 잠시 쉬는 사이 폭염에 아침부터 후텁지근했다. 습기로 가득한 한강 둔치 풀밭 오전 9시, 풀잎·꽃잎에 이슬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슬방울마다 해가 담겨 영롱하다. 풀잎에 앉은 이슬이 ‘또로록’ 구른다. 꽃 앞에 풀잎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듯 몸을 낮추지 않으면 보지 못할 장면이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 숨도 잠시 멈춘다. 그렇게 얼마 동안 그곳에 있었을까? 꿀벌도 나비도 경계를 풀고 카메라 렌즈 앞에서 논다.

나풀거리는 나비의 날갯짓은 갓 스무 살 푸른 시절을 닮았다. 가볍고 상쾌하다. 이슬 맺힌 풀꽃에 앉은 벌·나비는 꿀을 빨고 목을 축인다.

나비의 한바탕 춤사위를 보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야 주변 숲이 눈에 들어왔다. 꿀벌숲은 꽃이 피는 계절에 벌과 나비가 날아와 노는 숲이다. 도시에 사는 꿀벌의 소중함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들었다지만, 가득한 풀꽃과 그곳에서 노는 벌·나비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다. 숲 둘레 나무들이 담벼락 같아서 꿀벌숲은 아늑하다. 숲 밖은 한강 둔치 산책로와 자전거길이다. 숲을 드나드는 통로로 빼곡하게 집이 들어선 강 건너 산기슭이 보인다.

꿀벌숲 입구에서 벌 조형물이 있는 꿀벌쉼터를 지나 체력단련쉼터 쪽으로 걷는다. 각시원추리꽃이 길가에 피었다. 숲 그늘 원두막을 지나 숲의 끝에 다다랐다. 동호대교 앞에서 꿀벌숲은 끝난다. 운동기구가 있는 쉼터 나무 그늘에 서서 강물을 바라보다 왔던 길을 되짚어 걷는다. 올 때는 보지 못했던 풍경이 보인다. 또 걸음이 느려진다. 꽃처럼 풀잎처럼 나비처럼 너울너울 걷는다. 푸르러진다.

서래섬 수양버들 그늘에서 낚시하는 할아버지와 손자

꿀벌숲을 나와 한강을 따라 걷는다.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를 탄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한갓진 풍경을 뒤흔들고 지나간다. 강물이 불어나 평소보다 세차게 흐른다. 사람 뜸한 곳에 서서 흙탕물을 물끄러미 본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다 외지 못한 정희성 시인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앞부분이 자꾸 입안에서 맴돌았다. 까닭 없이 마음이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반포대교 아래를 지나 서래섬에 도착했다. 서래섬은 1980년대 한강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인공섬이다. 1972년 한강에 제방을 쌓기 전에는 지금의 서래섬을 포함한 그 일대가 모래펄이었다고 한다. 서래섬이 속한 반포동의 한자 이름이 원래 서릴 반(蟠)에 개 포(浦)였다고 한다.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이 한강을 만나는 형국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서래섬 수양버들길. 한강 흙탕물에 도심의 아파트 건물이 비친다.

다리를 건너 서래섬으로 들어갔다. 흙탕물에 쓰레기가 둥둥 떠내려간다. 수양버들이 그 물에 닿을 듯 말 듯 가지를 늘어뜨렸다. 서래섬은 물가의 수양버들 길로 유명하다. 수양버들 그늘 길을 걷는다. 섬 둘레에 난 길 곳곳에 채 마르지 않은 진흙이 남아 있었다. 신발에 진흙이 달라붙어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마른 풀밭에 흙을 비벼 깎아내고 돌바닥에 신발을 턴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다. 장마에 흙탕물 쓰레기와 함께 떠내려왔는지, 등껍질에 구멍이 뚫린 자라 사체도 있었다. 폭염에 그 모든 것이 마르는 냄새가 물비린내와 섞여 공중에 퍼진다. 사람들은 그 길에서 앉아 쉬고, 걷고, 낚싯대를 드리운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수양버들 그늘 아래 앉아 낚시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돼 보이는 손자는 익숙한 듯 바늘에 낚싯줄을 고쳐 맨다. 할아버지와 손자는 말은 없었지만 격 없이 깊어 보였다. 꼭대기부터 늘어진 수양버들 가지가 폭포수 같다. 건듯 부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손자 머리 위에서 수양버들 가지가 낭창거린다.

서래섬을 나와 동작대교 남단 쪽으로 걷는다. 벌써 옷이 젖었다 마르기를 두세 번, 이제는 오히려 땡볕이 상쾌해졌다. 신작로 같은 흙길에 바람 불 때마다 흙먼지가 날린다. 마른 논바닥처럼 갈라 터진 흔적이 길가에 남았다. 채 마르지 않은 진흙 위에는 언제 다녀갔는지, 개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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