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두 천재가 사랑한 여인.. 그는 동지이자 매니저, 후원가였다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의 아내
시대 앞서간 예술 후원가 김향안
얼마 전 하버드대 동아시아학과에서 석사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이 필자를 찾아왔다. 김향안(1916~2004)을 주제로 논문을 쓰려는데, 자문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향안은 누구인가? 시인 이상의 아내일 때는 ‘변동림’이라는 이름으로, 화가 김환기의 아내일 때는 ‘김향안’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인물. 그녀는 20세기 한국 문예계를 대표하는 두 천재 예술가의 아내인 동시에, 스스로 수필가이자 화가로 활동하며 독자적인 삶을 끊임없이 추구했던 작가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변동림과 이상의 만남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이다. 1916년 서울 “송현(松峴) 마루턱”에서 나고 자랐다. 부친은 구한말 일본에 유학 가서 의학을 공부한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마땅한 직업을 갖지 못했다. 첫 아내와 사별하고 변동림의 모친과 재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 변동림은 모친이 마흔하나에 낳은 귀한 딸이었는데, 모친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자녀들도 흩어졌다. 변동림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잠시 도쿄에서 고학으로 불어를 공부한 후, 1935년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변동림이 이상을 만난 것은 친오빠 변동욱을 통해서였다. 변동욱은 당시 경성 예술가들이 모였던 ‘낙랑파라’ 카페에서 주로 음악을 선곡한 멋쟁이 지식인이었다. 이 다방은 공예가 이순석이 운영하던 곳으로, 변동림의 회고에 의하면 변동욱과 ‘동업’을 했다고 쓰여 있다. 이 카페에 가면 늘 변동욱이 있었고, 문학과 영화를 두루 섭렵했던 그는 문예계 네트워크의 핵심 인물이었다. 변동림은 학교 수업이 끝나면 오빠의 카페에 들러 음악을 듣고 책을 읽었는데, 어느 날 이상이 그녀를 소개해 달라고 변동욱을 졸랐다. 둘은 그렇게 1936년 낙랑파라에서 처음 만났다.
◇“어떤 두 주일 동안”
스무 살 문학 소녀 변동림은 이상의 문학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실려 대중적 지탄을 받았던 이상의 시 ‘오감도’에 대해, 변동림은 이상의 천재성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라 평가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불꽃이 일었다. 매우 지성적인 불꽃이었다. 이들은 영문학과 러시아 문학을 얘기했고, 베토벤과 모차르트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두 주일 동안 매일 만나 인적 없는 교외에서 나란히 걷기를 반복했던 모양이다. 이상의 유고 수필 ‘슬픈 이야기, 어떤 두 주일 동안’이 당시 정황을 가장 선명하게 그리고 있다.
나는 이 태엽을 감아도 소리 안 나는 여인을 가만히 가져다가 내 마음에다 놓아두는 중입니다… 여인, 내 그대 몸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으리다. 죽읍시다. “더블 플라토닉 슈사이드(double platonic suicide·정신적 동반자살)인가요?” 아니지요.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지요… 여인은 내 그윽한 공책에다 악보처럼 생긴 글자로 증서를 하나 쓰고 지장을 하나 찍어 주었습니다. “틀림없이 같이 죽어 드리기로.”
변동림의 회고 글에는 “우리 같이 죽을래?”라는 말을 고백처럼 들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상의 수필 내용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방풍림 우거진 속으로 철로가 놓여 있는 길”을 걸으며, “사람은 하나도 만날 수 없는 황량한 인외경(人外境)”에서 이들은 밀회를 나누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 변동림은 집을 나왔다. 가방에 몇 권의 문학책과 외국어 사전만 달랑 넣고. 그렇게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랑이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知性)이다”라고 변동림은 썼다. 지성을 바탕으로 변동림과 이상은 매우 깊은 정신적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두 개의 싱글 슈사이드”를 각오한 것이다. 각자의 내면을 너무나도 깊이 파헤친 나머지, 아프고 잔인한 사랑이었다. 결혼식을 올린 지 4개월 후 이상은 홀로 먼저 동경 유학을 떠났고, 거기서 1937년 4월 어이없이 생을 마감했다.
◇변동림에서 김향안으로
임종을 지키기 위해 변동림이 도쿄로 갔을 때, 이상이 마지막 소원으로 “센비키아(千匹屋·가게 이름)의 메론을 먹고 싶다”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메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죽은 이상을 위해, 변동림과 친구들이 장례를 치러주었다. 이때 김환기도 도쿄에 있었으니, 장례식에서 변동림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식으로 김환기와 변동림이 만난 것은 1940년대 초 서울, 일본인 시인 노리타케 가즈오(則武三雄)의 집에서였다. 어쩌면 김환기가 변동림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을지 모른다. 노리타케는 집에 두 사람을 초대해서 자연스러운 만남을 주선했다. 처음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별다른 인상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동림의 마음을 흔든 것은 김환기가 고향 섬에서 서울로 꾸준히 보내온 ‘그림 편지’였다. 매우 다정다감한 글과 그림이었다. 김환기는 이상이 지녔던 자학적 성향, 신경증적 예민함을 대신해서, 훨씬 부드럽고 서정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다만, 조혼 풍습으로 일찍 결혼하여 세 명의 딸을 둔 채 이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환기는 변동림에게 선뜻 고백할 처지가 못 되었다. 용기를 준 것은 변동림이었다. “열이면 어때? 데려다 교육하면 되지.” “대신 당신의 아호(어릴 때 부르던 이름)인 향안(鄕岸)을 내게 주세요.” 이렇게 해서 변동림은 김환기의 아호를 받아 김향안이 되었다. “같이 죽자”는 이상과의 사랑이 죽음을 맞은 후,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같이 살자”는 희망을 안겨주며,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김향안과 김환기, 서로를 지탱하는 힘
김향안은 당돌해 보일 정도로 당찬 여성이었다. 자신감과 대담성은 그 시대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경지였다. 김향안은 1944년 김환기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후, 1974년 환기가 뉴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김환기의 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내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김환기를 위해, 1955년 김향안 혼자 먼저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김환기의 작품 슬라이드만 달랑 들고서 말이다. 그녀는 소르본 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다니면서, 불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여,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도 잡은 후, 김환기를 파리로 오게 했다.
김향안은 특히 루냐 체코프스카라는 화랑 주인과 친분을 쌓아놓았다. 다사스 거리에 마련된 김환기의 첫 아틀리에도 루냐가 구해주었다. 루냐는 모딜리아니의 친구이자 모델로, 2010년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에서 도난당해 더 유명해진 ‘부채를 든 여인’의 실제 모델이었다. 총 16점의 모딜리아니 초상화가 그녀를 모델로 했다. 루냐는 자신이 운영한 화랑에서 김환기의 파리 첫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이후 김환기는 파리에 체류한 2년 동안 5번의 전시회를 개최했고, 김향안은 화랑과 거래를 진행하고 통번역을 담당하며 매니저 역할을 자처했다.
김환기는 아내의 수고로움과 능력을 처음부터 매우 높이 평가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김향안의 신랄한 비평도 달게 받아들였다. 그뿐인가. 환기가 그린 그림에는 온통 아내의 얼굴이 등장한다. 그가 쓴 편지, 엽서, 생일 카드에도 김향안을 향한 사랑과 신뢰가 물씬 넘쳐난다. 김향안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김환기를 위해, ‘화가의 아내’라는 일종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지원했다고 할 수 있다. 뉴욕 체류 시절에는 백화점 판매원을 하고, 종일 글을 옮겨 적는 필사(筆寫)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이 ‘내조’라기보다 ‘서로 돕는 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부부임을 넘어 ‘동지(同志)’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큐레이터, 수필가, 화가 김향안
1974년 김환기의 죽음도 갑작스러웠다. 목디스크를 치료하는 간단한 수술이라 생각하고 입원했다가, 수술 직후 뇌출혈로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30년간 동고동락했던 이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김향안은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다”고 썼다.
김향안은 다시 30년의 삶을 혼자 살아낸 후 2004년 생을 마감했다. 그사이 김향안은 김환기를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세계 유수 미술관에 김환기 작품이 소장되도록 했고,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지금은 국고로 살 엄두도 내지 못하는 대표작들을 기증했다. 환기재단을 설립해서 출판 사업을 벌이는 한편, 미술평론가와 작가를 후원하는 일도 했다. 무엇보다 김향안은 건축가 우규승에게 설계를 맡겨 환기미술관을 1992년 서울 부암동에 건립했다. 그녀는 스스로 큐레이터이자 미술관 경영자였다.
또한, 김향안은 평생 자신만의 시간을 쪼개어 수필가로서의 정체성을 놓치지 않았다. 파리와 뉴욕 시절 내내 꾸준히 수필을 써서 발표했고, 총 5권의 수필집을 출간했다. 그녀의 놀라운 재능은 ‘화가’로서도 발현되었다. 뉴욕 화실에 들어오는 햇살이 아까워 그림을 그렸다는 김향안. 그녀의 작품은 밝은 대낮의 빛에서만 감지되는 환한 색조의 섬세한 변주를 보여준다. 김환기와는 분명 다른 화풍을 구사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리움’의 정서만은 두 사람 작품에서 공통으로 흐르는 특징이다.
한편, 김향안은 시인 이상을 기리는 일에도 힘을 보탰다. 이상이 죽은 지 53년이 지난 1990년, 그의 시비(詩碑)를 건립하려는 논의가 한국에서 일어나자, 직접 사비를 들여 뉴욕의 조각가 한용진에게 제작을 맡겼다. 한용진 특유의 무심하기 그지없는 비석이, 그렇게 이상의 모교인 보성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김향안의 대단한 점은 예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신념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먼저 간 두 남편에게 보낸 진심 어린 신뢰만큼이나, 이들이 생산한 예술(문학이든 미술이든)의 가치에 대해 확실한 믿음을 가졌다. 그 확신이야말로 김향안으로 하여금 과감한 결단과 끊임없는 도전을 가능케 한 힘이었다. 어떤 점에서 김향안은 세상이 예술가를 알아주지 않던 시대를 살아낸, 누구보다 선구적이고 용감한 예술 후원가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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