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파일] "연세가 어떻게.."
비 추적대던 날이었습니다. 강원도 인제와 고성을 잇는 백두대간 고개 새이령(641m)에서 간신히 사람을 만났습니다. 취재 과정상 이름과 나이를 묻습니다. 초면에 나이를 알려달라는 게 쉽지는 않습니다. “연세가 어떻게…”라며 나이를 묻는 어려움을 피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한국 나이’로 대답합니다. ‘만 나이’를 물어보면 두 살이 줄어들 때가 있습니다. 결국, 기사에는 ‘연 나이’를 싣습니다. 한국에는 이렇게 세 가지 나이가 있습니다.
국어학자 홍윤표 연세대 명예교수는 명사 ‘나이’는 동사 ‘낳다’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어간 ‘낳’에 주격조사 ‘이’가 붙었습니다. ‘ㅎ’을 받침으로 쓸 수 없었으니, ‘낳이’가 아니라 ‘나히’로 표기했는데, 그게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나이에 민감합니다. 모임에서 “민증 까”라는 말은 나이로 서열을 매기자는 표현입니다. 지하철 노약자석에서 “당신 몇 살이야”라며 악다구니 쓰는 장면을 본 적이 있겠지요. 회사에서는 입사 동기라도 한 살 위이면 선배로 모시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에는 유교적 문화의 잔재가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유교의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나이에 민감한 이유로 보기 쉬운데, 장유유서는 친족 간의 항렬을 엄격히 하며 시쳇말로 ‘개 족보’가 되지 않도록 단속하자는 의미”라며 “사실상 나이를 따지기 시작한 것은 같은 나이에 입학해서, 정해진 기간에 공부하고, 같은 나이에 졸업해야 하는 근대적인 학제가 도입된 이후라고 보면 된다”고 밝힙니다.
그래서 진작부터 ‘만 나이’로 통일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는 ‘만 나이’를 정착시키자는 국민청원이 수차례 올라갔습니다. 같은 동아시아권인 중국·일본도 ‘만 나이’를 공식화한 마당에 우리도 국제 추세에 맞추고, 세 가지 나이 셈법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과 혼란을 줄이자는 겁니다. ‘만 나이’ 통일 법제화는 지난 대선 윤석열 후보의 공약이었습니다. 지난해 이장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이어 지난 5월에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도 관련 법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한국리서치가 지난해 12월 성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10명 중 7명(71%)이 한국식 나이를 폐지하고 ‘만 나이’를 사용하는 것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찬성 이유로는 ‘법률 적용 및 행정 처리에서 오는 혼란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53%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셈법은 ‘세는 나이’가 82%로 가장 많았습니다. ‘만 나이’는 10%에 불과했습니다.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혼란이 불가피함을 보여 주는 수치입니다.
이장섭 의원의 '연령 계산 및 표시에 관한 법률안'에 대해 행정안전위원회는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사안인 만큼 연령 계산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우선 필요할 것으로 보임'이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관습상의 나이와 행정·법률상의 나이가 하나가 될 경우 여러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판단으로 보입니다.
교육도 문제입니다. 3월 1일~2월 말일이었던 취학 연령 기준일을 1월 1일~12월 31일로 바꿔 시행한 시기가 2009년입니다. ‘만 나이’에서 ‘세는 나이’로 바꾼 거죠. 속칭 ‘빠른 연생’은 사라졌습니다만, ‘만 나이’로 통일할 경우 개정 초·중등교육법을 다시 뒤집을지, 뒤집을 경우 어떤 혼란이 올지 숙고해야 하겠습니다.
고성에서 인제 쪽으로, 새이령 너머 마장터에서 백모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내가 1952년생이니 70세요. 70세”라고 말했습니다. ‘만 나이’로 자신의 나이를 밝히는 10%의 한국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김홍준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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