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향상에 도움" 놀며 일하는 워케이션, 해외로 확대
기업들 앞다퉈 원격근무 실험
직원 복지, 삶의 질, 직무 만족도 향상
조씨처럼 여행지에서 일하며 틈틈이 휴가를 즐기는 ‘워케이션’(work+vacation)이 직장가의 새로운 근로 풍토로 떠오르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재택근무나 유연근무가 확산하면서 원격근무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지자 기업들이 앞 다퉈 워케이션 실험에 나선 때문이다. 최대 포털 기업 네이버는 지난 4일 이런 워케이션 제도 도입을 발표했다. 매주 추첨을 통해 직원 10명이 강원도 춘천에서 최장 4박 5일 근무할 수 있게 했다. 향후 일본 도쿄로도 직원들을 보내기로 했다. 배달 플랫폼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도 내년부터 모든 직원의 괌·몰디브 등 해외 여행지 원격근무를 허용한다고 14일 밝혔다.
과거였다면 직원들이 놀면서 일하도록 허용하는 것을 금기시했을 기업들이 워케이션 실험에 한창인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워케이션이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기대나 믿음 때문이다. 한 기업 인사담당자는 “팬데믹을 계기로 직원들의 워라밸(work and life valance, 일과 삶의 균형) 보장이 곧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사내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잘 노는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있듯, 직원들의 리프레시(refresh, 재충전)가 회사 입장에서도 득이 된다고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직원들이 여행지에서 심신의 안정을 취하면서 일하는 게 생산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관광공사가 국내 주요 기업 인사담당자 5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63.4%가 워케이션 제도 도입을 긍정적이라고 봤다. 지난해 잡코리아의 일반 직장인 대상 설문조사에서 워케이션을 긍정적으로 본 비율(85.2%)보다는 낮지만 기업 10곳 중 6곳 이상이 워케이션을 좋게 보고 있는 것이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은 워케이션을 통해 직원들이 얻는 효과에 대한 질문에 ▶복지 향상(98.0%) ▶삶의 질 개선(92.3%) ▶직무 만족도 향상(84.6%) ▶생산성 향상(61.5%) 순으로 꼽았다(복수응답).
기업들의 워케이션 제도 도입은 단지 이 때문만이 아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 1분기 기업들의 구인 인원은 130만3000명으로 전년 동기보다 22.3% 늘었다. 그만큼 최근 산업계는 일자리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는 인력난을 겪고 있다. 특히 정보기술(IT) 개발자들의 몸값은 금값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높아졌다. 경쟁사에 신입·경력 인재를 뺏기지 않으려면 고(高)연봉은 물론이고 빼어난 복리후생까지 보장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워케이션 제도도 이런 차원에서 히든카드로 쓰이고 있다는 분석이다. 주정환 총괄에 따르면 라인플러스는 올 상반기 입사 지원자 수가 지난해보다 30%가량 증가할 만큼 워케이션 효과를 누리고 있다.
선진국 기업들이 워케이션 제도 도입에 적극적이라는 점도 국내 인식과 분위기 변화에 영향을 주고 있다. 미국에선 에어비앤비가 오는 9월부터 직원들을 대상으로 연간 최장 90일씩 170여 개국에서 근무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했고, 클룩도 직원들이 최장 30일간 세계 어디서든 업무와 여행을 병행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이외에도 인재들의 창의성을 중시하는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기업들이 자국 내 워케이션 허용을 당연시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자동차를 몰았을 때 약 5시간 거리에 있는 휴양지 타호(Tahoe) 호수가 이런 워케이션 거점으로 유명하다.
일 워케이션 시장 규모 5년 새 5배 늘듯
이 같은 분위기 속에 국내에선 자유롭고 수평적인 기업문화를 지닌 IT 업종에서뿐 아니라 다른 업종의 기성 대기업 계열사까지 워케이션 실험에 나서고 있다. 롯데멤버스와 CJ ENM, 한화생명 등이 대표적이다. 롯데멤버스는 추첨을 통해 일부 직원들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국내 여행지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제주에 이어 부산과 강원도 속초로 원격근무지를 확대했다. CJ ENM은 제주, 한화생명은 강원도 양양에서 직원들의 워케이션을 허용하고 있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올 초 국내 워케이션 관련 여행 상품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29%나 증가했다(취미·여가 플랫폼 기업 프립 집계).
전문가들은 재계의 워케이션 실험이 반짝 유행에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향은 LG전자 고객경험혁신담당 상무(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는 “워케이션 트렌드는 지역경제 활성화를 노린 지방자치단체들의 지원, 여행을 생활화하는 20·30대 ‘MZ세대’의 라이프스타일, 전국적으로 수준 높게 구축된 IT 인프라 등 삼박자가 만나 빠르게 자리 잡았다”며 “팬데믹을 계기로 충분한 예행연습을 마친 만큼 앞으로 해외 주요국처럼 보편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시적인 기간에 일부 직원만 대상으로 하는 워케이션 제도가 1년 365일 전사적 변화를 요하는 재택근무나 유연근무 제도에 비해 부담을 덜 준다는 점도 기업들을 계속 유인할 요소로 분석된다.
그러나 일각에선 워케이션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제조업 등 워케이션 제도 도입이 사실상 어려운 분야가 근간을 이루는 국내 산업계에서 일부 업종만 워케이션의 혜택을 누리는 데 따른 ‘상대적 박탈감’에 다수 직장인의 근로 의욕만 저하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대·중소기업 간 복지 양극화 심화 우려도 제기된다. 대기업으로부터 일감을 받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손모(34)씨는 “1분 1초가 모자라고 일손까지 부족한 우리 같은 기업에선 (워케이션은) 꿈도 못 꾸는 먼 나라 얘기”라며 “휴가나 제때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워케이션이 직원들의 복지 향상이나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정말 도움이 되는지도 좀 더 따져봐야 한다는 분석이다. 잡코리아 설문조사에서 워케이션을 부정적으로 본 14.8%의 직장인들은 ▶휴양지에서 일하고 싶지 않아서(70.8%) ▶업무 집중도가 떨어질 것 같아서(41.6%) ▶워라밸이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아서(28.5%) 순으로 이유를 전했다(복수응답).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 전반의 오랜 기업문화와 그간의 디지털 전환 추세 등을 고려하면 일을 휴가처럼 하기보다 휴가만 일하듯 보내게 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워케이션이 장기적으로 정착되려면 이를 더 여유롭게 보는 사회 분위기부터 조성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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