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야설'은 사회 변화를 위한 '정치적 행위'였다[책과 삶]
발리 카우르 자스월 지음|작은미미·박원희 옮김|들녘|496쪽|1만7800원

성적 판타지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선정적인 이야기를 ‘야설’이라고 한다. 미국 잡지 ‘플레이보이’를 떠올려보자. 노골적으로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식으로 표현된 여성의 신체를 두고 ‘성적 대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물들은 그것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누구에 의해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는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닌다. ‘플레이보이’를 10대 남자애들이 시시덕대며 돌려보고 있다면 여성은 오로지 남성 중심의 성적 욕망을 위한 성적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얀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야 하는 인도 시크교도 과부들이 ‘플레이보이’의 한 장면을 보고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거침없는 이야기로 쏟아낸다면? 그것은 ‘정숙한 과부’라는 사회적 요구에 맞춰 자신의 욕망과 자유 등 모든 것을 삭제한 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표현함으로써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때 그들은 성적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다. 물론 그 이야기가 야하고 재미있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글쓰기를 빙자한 ‘야설 수업’
‘금기’였던 억눌렸던 성적 판타지 나누며
보수적이고 성차별적 공동체에 변화
싱가포르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발리 카우르 자스월의 장편소설 <정숙한 과부들을 위한 발칙한 야설 클럽>은 그런 이야기다. 영국에 이주한 인도의 시크교 공동체에서 벌어지는 여성들의 욕망과 자유에 관해 말한다.
저자인 발리 카우르 자스월은 인도 펀자브계 가족에서 성장했다. 시크교는 여성은 모두 ‘카우르’, 남자의 성은 ‘싱’을 쓰며, 엄격한 종교적 전통에 따라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를 지녔다.
영국으로 이주한 펀자브 출신 시크교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들은 런던 외곽에 그들만의 ‘작은 인도’를 만들어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민 2세대인 자식들은 부모 세대가 고집하는 전통과 서구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갈등을 겪는다.
주인공 니키는 전통적인 딸의 역할을 기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견딜 수 없다. 자신을 ‘동서양의 혼종’이라고 느끼며 “영국 그리고 인도, 두 부분으로 쪼개진 느낌”을 받는다. 아버지의 강요로 법대에 진학하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해 자퇴하고 집에서 나와 펍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모색한다. 니키는 ‘UK 페미니즘 파이터’의 블로그에 델리와 런던의 캣콜링을 비교하는 글을 쓰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언니 민디는 부모님의 요구에 충실하다. 중매결혼으로 좋은 남편감 찾기에 혈안이 돼 동생 니키에게 자신의 결혼 중매 광고를 시크교도들의 사원 ‘사우스홀’ 게시판에 붙여달라고 한다.
이곳에서 니키는 나이든 여성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교사를 모집하는 광고를 보고 지원한다. 하지만 모인 학생들은 모두 하얀 옷을 입고 하얀 스카프로 머리를 가린 ‘과부룩’을 한 여성들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글쓰기는커녕 글자를 읽을 줄도 모른다. 니키는 이들에게 알파벳부터 가르치려고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과부들이 지루한 알파벳 수업에 만족할 리 없다. 이들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다룬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이라며 나누게 되고, 서로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지어내면서 자신만의 욕망을 생생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수업이 ‘변질’된 이유가 있다. 남편에게 종속되어 살아가는 여성들은 남편마저 죽으면서 무시해도 되는 존재,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간다. 남편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간 만지트는 차라리 과부처럼 보이는 게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해 ‘과부룩’을 한 채 지낸다. 과부들은 “우리가 진정 그리워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훨씬 재미있거든요. 혹은 우리에게 애초부터 주어진 적 없는 것들에 대해서”라고 말하며 자신이 지어낸 야한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준다. 보수적인 펀자브어엔 성기를 가리키는 단어도, 강간을 일컫는 단어도 없다. 이들은 갖가지 과일과 채소, 꽃과 자연에 빚대어 황홀하고도 근사한 ‘야설’을 지어낸다. 이들의 이야기는 필사돼 복사본과 스캔본으로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간다.

성차별, 이민 1·2세대의 갈등과 디아스포라,
명예살인들 둘러싼 스릴러적 요소도
리들리 스콧 감독 제작사에서 영상화 예정
‘야설’을 매개로 여인들이 지닌 아픔과 시크교 공동체의 비밀이 드러난다. 별자리가 맞다는 이유로 10세 나이에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많은 영적 지도자와 결혼해야 했던 타람팔, 가난을 이유로 마음에도 없던 남자와 급하게 중매결혼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해야 했던 아르빈더 등….
한편에는 시크교 공동체의 비밀이 있다. 그 중심에는 글쓰기 강좌를 개설하고, 니키를 못마땅해하는 쿨빈더의 딸 마야의 죽음이 있다. 마야의 죽음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된다. 시크교 공동체에는 ‘형제회’가 있어 여성들을 감시한다. 일자리를 잃은 젊은 남자들로 구성된 형제회는 자신들을 ‘윤리경찰’이라 부른다. 이들은 공동체의 명예를 지킨다며 여성들에게 머리를 가리라고 지시하거나, 가방을 뒤지고 행동을 감시한다. 더 심한 짓도 한다. ‘현상수배’라 불리는, 부모의 결혼 강요를 피해 도망간 딸들을 쫓아가 집으로 끌고 가는 일이다. 납치나 테러에 가까운 행위지만 공동체의 명예, 정확히는 남성의 명예를 위해 이런 일들이 용인된다.
이들의 ‘야설’이 널리 퍼지면서, 니키와 과부들의 수업의 정체도 드러날 위기에 처한다. 수업의 정체가 탄로난다는 것은 곧 명예의 실추이며, 이들에 대한 폭력과 테러가 허용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니키와 과부들은 금기에 도전하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해지면서 폭력과 공포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얻고, 연대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연대하면서 공동체의 금기였던 마야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진다.
소설은 완급을 조절하며 환상적인 야설과 인도 시크교 공동체의 성차별과 폭력과 같은 사회적 문제, 명예살인과 관련된 스릴러적 이야기를 솜씨 좋게 엮어낸다. 또한 이민 1·2세대의 갈등, 디아스포라를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델마와 루이스> <마션>의 리들리 스콧 감독 제작사에 판권이 팔려 영상화를 앞두고 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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