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의 우영우.."서툴지만 소통..드라마와 닮은 듯 달라"

윤기은 기자 2022. 7. 1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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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스펙트럼 장애' 장지용씨의 하루

“안녕하세요.” 지난 13일 오전 8시 인천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를 나온 청년이 오른손을 높이 들어 기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중소기업 인턴사원으로 수필 작가이자 ‘역사 덕후’이기도 한 장지용씨(33)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이라고도 부른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장씨와 같은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나온다. 주인공 우영우는 빛에 민감해 안대를 끼고 잠을 자고, 길거리 소음을 차단하려고 헤드폰을 낀다. 사람들과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지만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수석 졸업하고 국내 최대 로펌에 들어갔다.

장씨는 자신이 우영우와 닮은 점도, 다른 점도 있다고 했다. 범주를 뜻하는 ‘스펙트럼’이라는 말에서 보듯 자폐인마다 증상의 종류와 강도가 각기 다르다. 현실 속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은 어떤 모습일까. 기자는 출근길부터 점심시간까지 반나절을 장씨와 동행했다.

이날 오전 8시8분 인천 미추홀구 아파트 앞 버스정류장. 장씨는 511번 시내버스에 타자마자 이어폰을 꺼내 클래식 라디오 애플리케이션(앱)을 켰다. 장씨는 “대중교통에서 ‘삑’ 소리가 들리면 힘들다”며 “버스 안에 있는 전광판을 보고 정류장을 알아차린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린 장씨가 지하철로 환승하기 위해 인하대역으로 걸어갔다. 장씨는 드라마에 나오는 우영우와 달리 기자가 질문할 때마다 눈을 잘 마주쳤다. 물론 처음부터 타인과 교감을 잘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 조면희씨(62)가 아들이 ‘다르다’고 느낀 건 그가 4세 때였다. 장씨는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장씨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엄청나게 훈련받은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생 때 처음 놀이치료를 받은 그는 대학까지 비장애인과 함께 다니며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다.

인하대역에 다다랐을 때쯤 ‘법전을 외우는 우영우처럼 뛰어난 능력이 있냐’고 물었다. 장씨는 웃으며 “서울대를 나오지는 않았다”고 했다. “제가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국사, 세계사, 근현대사 모두 1등급을 받았어요. 요즘도 역사 과목 수능 문제집을 구해서 푸는데 기껏 해야 2개 틀리더라고요. 사람 사는 얘기를 알 수 있어 역사를 좋아합니다.”

■“자폐 대체어 있었으면…퇴근 후에는 친구 만나러 가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장지용씨(왼쪽)가 지난 13일 직장 동료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문재원 기자

전동차로 11분을 달려 직장과 가까운 호구포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출구로 나가기 위해 계단 쪽으로 몰려들었다. 장씨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었다. 회사 건물에 도착해서야 입을 뗀 그는 “이제야 정신이 든다”며 “사람들이 너무 시끄러웠다”고 했다.

장씨의 회사는 땅을 측량해 온라인상에 구현하는 일을 한다. 사무실에 도착한 장씨는 부동산정보조회 사이트에서 얻은 지적 정보를 엑셀파일로 입력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직속 상사인 안준혁씨는 장씨의 입사 소식에 걱정부터 했다. “청소나 복사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하지만 이력서에 영어 수준 ‘중’에 체크한 것을 보고 자료 번역 업무를 맡겼습니다. 잘하더라고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동료가 “부자들은 철들지 말라는 법이 있나보다”라고 하자 우영우는 “그런 법은 없다”고 대꾸한다. 장씨도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말의 ‘뉘앙스’와 발화 의도를 알아채는 게 가장 어렵다고 했다. 얼마 전 장씨는 회사 대표로부터 “열심히 안 하면 해고야”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졸인 적이 있다.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취지의 농담이었는데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자폐 당사자들은 간혹 ‘눈치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장씨도 임원 회의 중 아는 주제가 나와 갑자기 끼어든 적이 있다. 하지만 장씨의 상사인 안씨는 비자폐인과의 소통 방식을 익히기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자폐 당사자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소통할 준비가 돼 있다. 정작 준비가 더딘 건 한국 사회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시니어 변호사는 우영우의 입사를 반대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자폐 당사자들의 취업 역시 녹록지 않다. 대학에서 사진영상미디어학을 전공한 장씨는 지금까지 9차례 직장을 옮겼다. 공공기관 필기시험에 붙고도 면접에서 떨어진 게 수차례다. 계약직이나 인턴으로 취업한 곳에서는 정규직 채용을 해주지 않았다.

낮 12시 장씨가 다른 부서 직원들에게 “식사하러 가요”라고 제안했다. 장씨는 기자에게 ‘스스로를 가두다’라는 뜻이 담긴 ‘자폐’라는 단어를 말하며 “당사자 특성을 반영하면서도 차별성 없는 대체어가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퇴근 후 계획을 소개했다. “신사동에서 ‘클럽 하우스’(음성 기반 소셜미디어)에서 만난 친구들과 보기로 했는데 신이 나요.”

윤기은 기자 energy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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