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가 입었던 당의·스란치마에 민족의 아픔 밴 듯

김예진 2022. 7. 14.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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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 '나라밖 문화재의 여정'
빼앗기고 전쟁중 불법반출됐던 유물
기증받고 사들이고 회담서 돌려받아
'호조태환권 원판' 등 40점 한 자리에
조선시대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
왕들의 글씨 탁본 '열성어필' 첫 공개
덕혜옹주 당의와 스란치마. 연두색 당의 크기로 보아 12∼14세용으로 추정된다.
상의 40.4㎝, 하의 63.3㎝. 덕혜옹주(1912∼1989)가 입었던 녹당의(상의)와 스란치마(하의)의 실물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지는 감각은 미처 예상치 못한 작디작은 크기다. 덕혜옹주라는 권위 높은 황족의 이름, 고종 고명딸로 13세에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온전한 정신으로 지내지 못한 비극적 운명의 무게가, 어린이 한복만 한 옷 크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당의에 남아 있는 얼룩과 스란치마 허리춤 구김에서 옷을 입었던 덕혜옹주 사용감이 여실하게 전해지고, ‘福’(복) 자 등 정성스럽게 새겨진 금박 무늬와 기품 있고 단정한 자태엔 조선왕실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진 황족 의복 문화와 역사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국권피탈의 비극, 민족 고난의 상징물일 뿐 아니라 살아 돌아온 유물과 재회하는 감격이 남다르게 전해진다.
당의와 스란치마는 국가 작은 의식 때 착용하는 예복이다. 이 옷은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났을 무렵 10세쯤에 입은 옷으로 추정된다. 복식사로는 당대 최고 수준의 조선왕실 복식 유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실견하는 후세 사람들에게 백인백색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상과 감각, 사유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무한한 가치를 지닌다.
덕혜옹주 당의와 스란치마. 연두색 당의 크기로 보아 12∼14세용으로 추정된다.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
이런 귀중한 유물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게 된 건 불과 7년 전이다. 원래는 덕혜옹주 다른 유품과 함께 영친왕이 기증해 도쿄에 남아 있었다. 2015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 겸 덕혜옹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 문화학원 복식박물관으로부터 환수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유물

서울 종로구 효자로, 경복궁 경내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 같은 환수문화재를 모은 특별전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을 최근 시작했다. 문화재청이 환수문화재만을 한데 모아 전시를 여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설립 10주년을 기념해 지난 10년간 활동을 돌아보기 위해 기획됐다. 환수문화재 약 40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환수 후 언론과 대중에 최초로 공개되는 전시품은 3점이다. 그중 하나인 ‘나전 매화, 새, 대나무 상자’는 조선시대 유물로 흑칠 바탕에 나전으로 무늬를 장식한 정방형의 상자다. 박물관 측은 “매화와 대나무, 모란 넝쿨, 꽃, 새 등 무늬가 조합된 특징이나 자개 표면에 균열을 만들어 붙이는 타찰법이 사용된 점 등으로 보아 18∼19세기 제작품으로 추정되며, 국내에 현전하는 수량이 많지 않은 나전 상자로, 무늬 표현과 자개 제작 수준이 뛰어나고 보존 상태도 양호해 전시·연구 등 활용가치가 높다”고 설명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 개인소장자에게서 직접 구입해 지난해 환수됐다.
열성어필
나머지 2점은 지난 3월 미국에서 환수한 ‘열성어필’과 ‘백자동채통형병’이다. 열성어필은 조선시대 왕들의 글씨(어필)를 탁본하여 엮은 책이다. 어필은 왕의 상징물로 여겨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다뤘으며 왕이 즉위하면 돌아가신 선왕의 어필을 간행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많은 어필이 소실됐다. 이후 1662년 현종 때 남아 있는 9명 어필을 모아 처음으로 열성어필을 간행했다. 1679년, 1722년, 1725년에도 간행이 이어졌다. 이번에 공개된 열성어필은 1722년에 간행돼 지중추부사 황흠(1639∼1730)에게 내려진 석판본이다. 1725년 열성어필이 새로 간행될 때 회수돼 태조, 숙종, 경종의 어필이 추가된 특이한 사례여서 특히 귀중한 자료다. 미국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낙찰받았다.
백자 표면을 구리 안료로 장식한 병인 백자동채통형병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스탠리 스미스(Stanley Smith, 1876∼1954)가 소장했던 것이다. 국내 소장 사례가 적고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데다 국외 문화재의 반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국새 유서지보 문화재청 제공
◆반출과 환수의 기막힌 서사

전시장 각 유물들은 저마다 반출과 환수의 기막힌 서사를 품고 있다. 전쟁 중에 유출, 도난 등 불법거래, 자발적 기증 등 사연이 가지각색이다. 국가지정문화재 국보인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가 유출했으나 민간과 정부가 힘을 합쳐 2006년에 환수했다.

보물인 ‘국새 황제지보’ ‘국새 유서지보’ ‘국새 준명지보’는 6·25전쟁 때 도난당했다가 한·미 공조로 그 존재를 찾아내면서 2014년 양국 정상회담을 통해 되돌아온 환수문화재다.

‘호조태환권 원판’은 6·25전쟁 때 미국으로 불법 반출됐다가 양국이 수사 공조를 통해 국내로 환수했다. 호조태환권 원판은 사그라진 근대화의 꿈이 담긴 유물이다. 1892년 고종이 근대적 화폐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신식화폐조례를 공표하고 태환서를 신설해 구화폐를 신화폐로 교환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호조태환권은 이때 태환서에서 구화폐를 회수하기 위해 발행한 교환권이다. 비록 유통되지 못했지만 조선이 만든 최초의 근대적 화폐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문인석’ ‘면피갑’은 소장자가 자발적으로 기증하는 방식으로 들여온 환수문화재여서 의미 깊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문인석은 독일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해당 유물이 불법 반출된 것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반환을 결정해 2019년 3월에 돌아왔다. 면피갑은 독일 상트오틸리엔수도원이 2018년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 박물관 측은 “매우 드문 사례”라고 강조했다.

전시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게임회사 라이엇게임즈가 한 역할이다. 온라인 게임 ‘리그오브레전드’로 유명한 이 회사가 2013년부터 꾸준히 기부한 누적 자금이 22억원을 넘는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유물이 해외 경매에 나왔을 때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낙찰받을 수 있었다. 현재 재단은 22억원 중 약 절반을 문화재 환수 및 해외 소재 문화재 복원 지원 등에 사용하고 절반을 기금으로 갖고 있다.

라이엇게임즈 후원으로 환수한 유물은 미국에서 2013년 환수한 ‘석가삼존도’, 독일에서 2019년에 환수한 ‘척암선생문집 책판’, 2019년에 미국에서 환수한 ‘백자이동궁명 사각호’, 2019년 미국에서 환수한 ‘중화궁인’, 2018년 프랑스에서 환수한 ‘문조비신정왕후 왕세자빈 책봉 죽책’으로 총 5점이다.

나라 밖 문화재에 대한 관심은 2011년 대규모 환수로 인해 관심이 환기됐다. 당시 프랑스에서 외규장각의궤 297책을,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시대 도서 1205책을 환수했다. 이를 계기로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2012년 설립돼 2013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재단은 지금까지 총 6개국에서 784점을 환수했다. 기증받은 사례는 680점, 재단이 매입한 사례는 103점, 영구대여를 받은 사례가 1점이다.

재단 김계식 사무총장은 “직원들이 지난 10년간 세계 곳곳을 누볐다. 비행거리가 629만㎞, 지구 160바퀴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국외 소재 문화재를 연구해 온 해군사관학교 군사전략학과 김경민 교수는 이번 전시 계기 기고문에서 “국제사회에서 문화재는 단지 약탈이나 훼손 시 문제를 넘어 정체성, 곧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같은 인권 차원의 문제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상대국의 반환 불가 입장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 문화재에 대한 해당 국가의 높은 관심, 역사적 지식, 이를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환수 노력”이라며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와 그 결과물인 유물에 가치를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는 인식이 문화재 환수의 장기적 노력을 이끌어 가는 힘이 된다”고 설명했다. 9월 25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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