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 꼼짝마".. 경찰, 위장수사 본격화

백준무 2022. 7. 14.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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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신분증 인쇄기 19곳 보급
n번방 계기 위장 수사 법제화 이어
제작 가능해져 활용도 높아질 듯
가짜여도 실존 인물 주민번호 필요
일각 "가상 신분증 만들 수 있어야"
"수사관 일탈 예방책 마련" 지적도
사진=연합뉴스
“신분(증) 아무거나 주고. 면허증, 여권 암거나(아무거나) 너인 거 알 수 있는 거.”

2020년 1월 경찰이 성착취물이 유포된 텔레그램 ‘박사방’에 잠입하려 할 때 운영자 조주빈은 이처럼 요구했다. 경찰이나 기자 등을 가려내려는 취지다. 당시 법규상 경찰의 신분 위장 수사가 불가능했기에, 경찰은 지인에게 부탁해 타인의 신분증을 확보한 뒤 수사에 나섰다.

앞으로 경찰이 수사상 필요할 경우 타인 신분증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질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 성범죄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가짜 신분증’을 본격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법 개정으로 관련 제도가 법제화된 데 이어, 위장 수사용 카드 인쇄기가 수사에 도입된다.

14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경찰은 올해 하반기 중 경찰청 및 전국 18개 시·도 청에 카드 인쇄기를 보급할 예정이다.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등 플라스틱 소재의 신분증을 인쇄할 수 있는 장비로, 경찰이 이를 도입하는 것은 처음이다.

경찰이 카드 인쇄기를 도입하는 것은 디지털 성범죄 수사에 적극 대응하기 위한 목적이다. 조주빈 사례처럼, 최근 디지털 성범죄는 폐쇄적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활용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추적이 쉽지 않은 해외 메신저 프로그램이나 다크웹으로 대화방을 만들고, 신분을 확인한 이후에 대화방 입장을 허용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9월까지만 하더라도 수사관이 신분을 숨기는 위장 수사는 법규상 허용되지 않았다. ‘n번방’ 사건 등을 계기로 수사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 그해 9월 개정돼 아동·청소년 대상 디지털 성범죄에 한해 위장 수사 제도가 법제화됐다.

경찰은 검사의 청구를 거쳐 법원의 허가를 받을 경우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디지털 성범죄를 추적할 수 있다. 긴급을 요할 때엔 법원 허가 없이 신분 위장 수사를 할 수 있지만, 48시간 이내에 법원 허가를 받지 못한 때에는 즉시 중단해야 한다. 경찰은 제도 도입 이후 5개월간 위장 수사로 96명을 검거했다. 이번 프린터 보급을 통해 경찰의 위장 수사는 현장에서 더욱 보편적인 수사기법으로 자리 잡게 될 전망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위장 수사 기법이 널리 쓰이고 있다. 미국의 경우 1980년 12월 연방수사국(FBI)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마약이나, 장물, 음란물 범죄 등 수사에 활용해 왔다. 1992년부터는 화이트칼라 범죄와 부패범죄, 테러범죄 등에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프랑스 형사소송법은 경찰관이 범죄자로 가장해 범죄단체에 잠입하는 것을 허용한다. 독일 또한 ‘중대한 범죄를 행했다는 객관적 근거가 충분히 존재하는 경우’에 한해 신분을 숨긴 비밀수사관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수사 일선에서는 “신분 위장에서 나아가 아예 가상 신분증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주민등록관리시스템상 인구수를 초과한 가상의 주민등록번호를 생성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짜 신분증이라고 하더라도 실존 인물의 주민등록번호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디지털 성범죄 수사 관련 조직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 관계자는 “조주빈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인 공범을 통해 신분증 주민등록번호를 조회했다”며 “이처럼 피의자가 주민등록번호 조회가 가능할 경우에는 가짜 신분증이라는 게 탄로 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수사관 개인의 일탈을 막기 위한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권헌영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디지털 성범죄의 위장 수사 쟁점과 과제’ 논문에서 “위장수사관 개개인의 일탈 문제뿐 아니라 자신의 수사활동이 헌법상 기본권의 침해행위에 해당되지 않도록 충분한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위장 수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백준무 기자 jm10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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