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이 교수 "수포자가 많은 건 경쟁 교육 탓..마음이 시키는 공부, 깊게 해야"

이정호 기자 2022. 7. 13.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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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즈상' 허준이 교수 간담회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가 13일 오후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에서 기자간담회를 하던 중 웃고 있다. 김창길 기자
학창시절을 평가받는데 다 써
학생들 용기가 배신당하지 않게
정책결정자들이 틀을 짜줘야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통하는 필즈상을 수상한 허준이 프린스턴대 교수 겸 고등과학원 석학교수(39)가 “한국에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많은 건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하고, 문제를 완벽히 풀어야 하는 사회·문화적인 여건 때문”이라고 말했다.

13일 서울 동대문구 고등과학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허 교수는 수포자가 양산되는 이유를 묻자 “학생들이 학창 시절을 공부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평가받기 위해 쓰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내 학생들이 이런 현실 때문에 해외 유수 대학에 유학을 가서도 특징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지적했다. 허 교수는 현재 재직 중인 프린스턴대 이전에 스탠퍼드대에서도 교수를 지내며 해외 각국에서 모인 최고 인재들의 학습 태도와 능력을 경험했다.

허 교수는 “한국 학생들을 보고서 느낀 건 다른 문화권 학생들보다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좁은 범위에서 빨리, 완벽하게 수학 문제를 풀 수 있지만 넓고 깊게 공부할 수 있는 준비는 비교적 덜 돼 있었다”고 밝혔다.

이런 환경을 개선할 돌파구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학생 개인의 노력이다. 그는 “학생들은 이런 현실에 주눅 들지 말았으면 좋겠다”며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하기보다 자기 마음이 시키는 대로 공부했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교육정책 결정자들에게도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정책을 바꿀 수 있는 분들은 이런 학생들의 용기가 배신당하지 않도록 정책적인 틀을 짜서 최대한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대수기하학’을 활용해 ‘조합론’을 연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필즈상을 받았다. 1차 또는 2차 다항식으로 직선이나 평면 등을 표현하는 대수기하학을 통해 특정 결과에 이르는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조합론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가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실생활에는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일반인들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허 교수는 ‘순수 수학’의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유하자면 중세시대인 불과 500년 전, 글을 읽고 쓰는 건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 얻는 능력이었다”며 “만약 국민이 글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에게 당시 어떤 영주가 ‘그런 일을 하면 내년에 가뭄이 들어 흉작이 생기는 걸 막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면 학자는 매우 곤란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순수 수학을 두고 당장 반도체 개발에 활용할 수 있는 연구 결과를 내는 수단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류의 인식 수준과 과학기술의 잠재력을 장기적으로 높이는 분야로 봐야 한다는 얘기다. 허 교수는 “제가 발견한 일부 내용이 특정 문제에 대한 계산 속도를 높이는 논리체계를 만들 수는 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런 일을 연구하면 저것이 되느냐’는 물음은 난처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날 기자간담회장에는 부인 김나영씨도 자리했다. 내내 조용히 지켜보던 김씨는 간담회가 끝난 뒤 몇몇 기자들과 만나 허 교수를 낭만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김씨는 “(허 교수가 )연애할 때에는 시도 직접 쓰고, 악기를 연주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최근 허 교수는 하루에 4시간가량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나머지 시간을 육아 등을 하며 가족과 주로 보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날 허 교수는 기자간담회 뒤 필즈상 수상을 기념한 강연회도 별도로 열었다. 전문 연구자뿐만 아니라 관계와 재계 인사, 대학생 등 200여명을 대상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1시간 동안 자신의 연구 내용을 소개한 허 교수는 “순수 수학이나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지속되기를 바란다”며 “저 자신도 한국 사회에서 받은 많은 것들을 최대한 돌려드리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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