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시선으로 관람"..대한제국 마지막 궁중잔치, 공연예술로 재탄생

선명수 기자 2022. 7. 12.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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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년 전 고종의 즉위 40주년·51세 기념해 열린 '임인진연'
객석을 어좌로 시야 설정..당대 사료 바탕 무대 위 재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잔치였던 1902년 ‘임인진연’을 기록한 그림 병풍 ‘임인진연도병’. 아모레퍼시픽미술관·국립국악원 제공

120년 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잔치가 공연예술로 다시 태어난다. 국립국악원은 올해 임임년을 맞이해 1902년 덕수궁에서 열린 ‘임인진연’을 무대에 올린다고 12일 밝혔다. 이 궁중 잔치가 재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02년 음력 11월8일에 거행된 ‘임인진연’은 고종의 즉위 40주년과 예순을 바라보는 망륙(望六)인 51세를 기념하기 위해 덕수궁 관명전에서 거행된 궁중 잔치다. 500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시기를 포함해 마지막 궁중 잔치로 기록돼 있다. 급변하는 개화기와 복잡한 국제 정세로 시국이 혼란한 와중에도 황실의 위엄을 세우고 자주국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잔치였다.

‘임인진연’은 임인년에 거행된 진연(進宴·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이라는 뜻으로, 황태자가 다섯 차례에 걸쳐 간청한 끝에 성사됐다. 고종은 당시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정세를 들며 네 차례 진연 개최를 거절하다가 태자와 문무백관들의 거듭된 간청 끝에 비용과 인원을 최소화해 진행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진연은 황제와 문무백관이 함께 참여해 공식적인 의례 성격이 짙은 ‘외진연’과 황태자와 황태자비, 좌·우 명부, 종친 등과 함께한 일종의 황실 내부 행사인 ‘내진연’으로 나뉘어 거행됐다. 이번 <임인진연> 공연은 그중에서도 예술성이 돋보였던 ‘내진연’을 재현한다.

120년 만의 재현은 진연의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한 당대 기록 유산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국립국악원은 황실의 진연을 기록한 진연의궤와 그림 병풍인 ‘임인진연도병’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무대를 구성했다. 연출과 무대미술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예술감독 등을 지낸 무대미술가 박동우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가 맡았다. 박 연출은 이날 오전 덕수궁 정관헌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이번 공연은 두 갑자(甲子)가 지나 120년 만에 처음 여는 진연이기 때문에 창작적 요소보다는 충실한 재현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진연의궤에 기록된 1902년 덕수궁 관명전에 열린 내진연도. 한국고전번역원·국립국악원 제공

박 연출은 “공연을 준비하면서 놀란 것은 당대 기록의 세밀함”이라며 “조선시대 기록의 우수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임인진연 의궤에는 당시 상에 올렸던 떡의 개수와 높이, 재료까지 다 정리가 돼 있었다. 오늘날 어떤 공연을 하더라도 진연의궤 만큼 완벽한 기록을 남길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1904년 덕수궁이 불타면서 임인진연이 열린 관명전도 소실되고 악기와 의상 모두 불탔지만 의궤와 도병은 살아남았다”며 “이를 바탕으로 공연을 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화가들과 기록원들에게 무한한 경의를 보낸다”고 말했다.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왼쪽에서 두번째 )이 12일 오전 서울 덕수궁 정관헌에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120년 만에 재현하는 궁중잔치 <임인진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제공

화재로 관명전은 소실됐지만 공연은 도병에 남아 있는 관명전을 무대 위에 재현한다. 주렴(朱簾·붉은 대나무발)과 사방으로 둘러쳐진 황색 휘장막으로 황제의 공간과 무용, 음악의 공간을 구분하며 사실감을 살릴 예정이다. 객석을 황제의 어좌로 설정한 것도 이번 공연의 특징이다. 관객이 황제의 시선에서 진연을 마주할 수 있도록 시야를 설정했다. 궁이 아니라 극장에서 열리는 공연이기 때문에 가능한 시선이다. 박 연출은 “도병에는 마치 드론이 황제를 정면에 두고 내려다 보며 찍은 것처럼 황제의 자리가 가장 멀리 있고 대부분의 진연은 그런 형태로 보게 되는데, 이번엔 시선을 바궈 용평상을 객석에 뒀다”며 “황제의 시선으로 구성한 공연을 통해 관객들이 궁중예술의 멋을 깊이 있게 감상하길 바란다”고 했다.

공연은 하루종일 열린 궁중 잔치를 90분으로 압축했다. 황제에게 일곱 차례 술잔을 올린 예법에 맞춰 꾸며진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황제가 입장할 때 추는 봉래의부터 시작해 헌선도, 몽금척, 가인전목단, 향령무, 선유락 등의 궁중 무용을 선보인다. 정악단은 황제의 등·퇴장 때 연주되는 보허자를 비롯해 낙양춘, 해령, 본령, 수제천, 헌천수 등 궁중음악을 연주한다. 이상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임인진연>에 사용되는 음악은 궁중예술의 집약체”라며 “국가의 정체성을 드높이고 황제의 무병장수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음악들로 구성됐다”고 설명했다.

<임인진연>에서 공연되는 궁중무용 ‘봉래의’. 국립국악원 제공

김영운 국립국악원장은 “궁중잔치는 음악과 의례, 무용 등 그 시대의 문화예술 중 가장 세련된 작품이 모이는 자리였다”며 “올해 임인년을 맞아 자주국가를 염원하고 우리 문화를 대내외에 알리고자 했던 궁중 연회의 가치와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 공연을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공연은 8월12~14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열린다. 국립국악원은 예악당 공연 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와 협의를 거쳐 120년 전 임인진연이 거행된 덕수궁 안에서 진연을 재현하는 방안도 추진할 예정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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