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인플레 덮친 日.. 100엔숍마저 300엔숍 됐다
■ 전환기의 일본 - (3) 출구 안보이는 日 경제
디플레 상징 100엔숍 가격 껑충
운영기업 이름 바꿔 개점하기도
불황 여파로 백화점 명품매장선
손님 없어 ‘한산’… 재고 ‘수북’
‘잃어버린 30년’ 경제침체 고통
재정적자가 GDP의 20배 넘어
도쿄 = 글·사진 김선영 기자
“여기에는 이제 100엔짜리 제품은 많이 없어요. 보통 다 200∼300엔 정도고, 100엔 제품이 다는 아니에요.”
지난 1일 일본 도쿄(東京)도 인근 100엔숍 계열 매장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물가 상승을 취재하러 왔다는 기자에게 위처럼 말했다. 실제 기자가 둘러본 해당 매장에서 파는 제품들은 엽서·젤리와 같은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는 100엔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잃어버린 30년간 ‘100엔숍’은 디플레이션의 나라인 일본을 상징하는 매장 중 하나였지만, 올해 들어 엔화 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하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100엔숍’들마저 ‘전 제품 100엔 균일가’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심지어 일부 ‘100엔숍’ 운영 기업사들은 최근 생존을 위해 ‘300엔숍’을 개점하고 있는 상황이다.
‘100엔숍’은 불황과 함께 성장해왔다. 버블 붕괴 이후 지난 30년간 장기 불황에 시달리던 일본 기업들은 상품 가격 인상이 여의치 않자 근로자들의 임금 상승을 억제했다. ‘저물가의 악순환’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소비 여력이 저하된 일본인들은 ‘100엔숍’이나 할인 잡화점 ‘돈키호테’를 전전하며 허리띠를 졸라맸다.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엔화 가치 하락으로 연료·전기·식품 가격이 상승한 반면, 가계 수입에는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도쿄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S는 “값싼 물건을 살 수 있는 100엔숍에 편의점을 가듯 간다”며 “지금도 잠깐 살 게 있어 돈키호테에 들르려고 한다”고 말했다.
‘허리띠 졸라매는 일본’의 현실은 명품 브랜드가 즐비한 일본 백화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 도쿄 신주쿠(新宿) E 백화점에 위치한 L 브랜드 명품매장에 본지 기자가 5가지 상품이 있는지를 물으니 모두 재고가 있었다. 한국 매장에서는 한 종류의 제품만 남아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고가 명품 브랜드로, 번호표를 뽑고 최소 1시간은 대기해야 하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 매장은 손님이 2∼3명에 불과할 정도로 한산했다. 이 매장 직원 N은 “한국은 재고가 남지 않을 정도로 제품이 잘 팔린다는데 정말이냐?”며 “여긴 대다수 제품의 재고가 남아있는데, 한국에서 이 가방은 얼마에 팔리느냐”고 되물을 정도였다. 침체된 경기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실제 30대 여성 T는 “한국은 ‘멋쟁이(おしゃれ)’인 사람들이 많아서 명품을 많이 사느냐”며 “일본에선 주위를 둘러봐도 고가 명품 브랜드 제품을 가진 친구가 그렇게 많진 않다”고 말했다.
이에 일본 정부도 고물가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들의 소비 진작을 독려하기 위한 대책을 연이어 내놓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총리가 지난 5일 트위터를 통해 “물가로 고통받는 국민을 위해 정부가 책임지고 대응하겠다”면서 서민 및 자영업자 지원용 2조7000억 엔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는 휘발유 도매업자에 대한 보조금 지급도 포함돼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유가 급등에 따른 서민경제 악영향을 줄이겠다는 계산이다. 추경 재원은 채권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하지만 효과가 없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다. 추경 편성이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2배가 넘는 일본의 공공부채에 더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지적이 먼저 제기된다. 또 기시다 정부가 경기침체에도 무리하게 방위비를 올려 민생을 외면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미치시타 나루시게(道下德成) 일본정책연구대학원 교수는 지난 6월 27일 도쿄에서 문화일보 기자를 만나 “일본 내에선 지금 재정적자가 GDP의 20배 이상일 정도로 심각한데 방위비 지출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많다”며 “지금처럼 일본 경제가 매우 힘든 상황에서 군비를 급격히 증강하면 민생도 살리지 못하면서 빚만 내겠다는 뜻인데, 군비만 늘리고 나라가 망하면 무슨 소용이냐”고 비판했다.
일본 사회가 이미 ‘빈곤의 일상화’를 겪고 있기 때문에 임시변통 정책이 아니라 구조적 개혁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후쿠시마 미노리(福島みのり) 나고야(名古屋)외국어대학 현대국제학부 부교수는 6월 말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일본에선 비정규직 워킹 맘이 코로나19 장기화로 회사에서 해고되면서 ‘빈곤의 일상화’가 되는 등 경제난을 겪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게이오(慶應)대의 이소자키 아쓰히토(의崎敦仁) 교수도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경제적 침체가 지속되면서 일본인 중 여권 가진 사람은 19%밖에 안 된다”면서 구조 개혁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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