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우파 내셔널리즘' 여전.. 한·일관계 급속 개선 기대는 금물

기자 2022. 7. 1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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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창수의 Deep Read - 日 현지에서 본 아베 사망

일본 최대 파벌이자 ‘보수의 심장’ 아베 영향력 강력… 기시다 정권, 홀로서기 정국 운영 어려워

‘역사수정주의’와 對韓 강경책 지속할 듯… 韓, 성급한 기대보다 美·日과 안보협력부터 모색 바람직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의 사망 사건이 국내외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도쿄(東京)에 출장 중인 필자가 현지에서 보고 느낀 것을 종합 분석해볼 때, 한·일 관계에 부정적 유산을 많이 남긴 아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죽음이 양국 관계의 급속한 개선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아베의 세례를 받은 우파 내셔널리즘은 확대 재생산되고, 과거사 문제 등과 관련한 역사수정주의는 강력히 전승되며, 보수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다.

◇보수의 심장 아베

역대 최장 정권을 유지했던 아베는 우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선거에서 6번 연속으로 승리함으로써 정권의 구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 ‘보수의 심장’으로 불렸던 아베는 이데올로그로서 강한 신념을 가졌지만 리얼리스트의 성격도 지녔다.

제1차 내각(2006년 9월∼2007년 9월)에서는 교육기본법의 개정 등 우파 색채가 강한 정책을 추진해 단명했다가 이를 교훈 삼아 제2차 내각(2012년 12월∼2020년 9월)에서는 금융완화, 재정출동, 경제성장을 근간으로 하는 아베노믹스를 추진했다. 아베노믹스는 디플레이션의 탈출과 엔고를 시정하기 위해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정책이었다.

또 ‘관저 주도’ 정치로 ‘아베 1강’ 체제를 완성했다. 아베의 염원인 개헌에는 실패했지만, 2015년 9월에는 ‘헌법해석’을 변경해 한정적인 집단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안전보장관련법을 성립시켰다. 대외관계에서는 ‘지구를 부감(俯瞰)하는 외교’나 ‘자유롭고 개방된 인도·태평양’ 등을 주창해 일본 외교의 지평을 넓혔다. 그가 전후체제 탈각을 위해 추진한 ‘보통국가 일본’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시대(2020년 9월∼2021년 10월), 그리고 지금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시대(2021년 10월∼)에도 계승됐다.

아베의 부정적 유산도 일본 정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정책적으로는 우파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국론이 분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아베 1강’ 체제의 장기집권 폐해도 드러났다. ‘모리가케 문제’ 같은 스캔들은 행정을 사유화한 전형적인 예다. 아베노믹스의 부작용으로 고물가 현상이 고착돼 양극화가 심화했다. ‘엔저’는 에너지와 식량 부문에서 가격 급등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국민의 실질임금 하락으로 이어졌고, 이에 따른 국민의 불만도 높아졌다.

◇아베의 강한 흔적

아베는 총리 퇴임 후에도 우파의 상징이자 ‘싸우는 정치가’로 영향력을 유지해 왔다. 자민당 내 파벌 연합에 의해 총리가 결정되는 시스템에서 일본 최대 파벌의 영수였던 아베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가 이끄는 기시파는 당내 제4위 파벌이다. 기반이 약한 기시다가 최대 파벌을 무시하고 정책을 추진하기는 어렵다. 기시다 정부의 대부분 정책에서 아베의 흔적이 발견된다. 방위비를 5년 이내 국내총생산(GDP) 대비 2%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도 아베 영향력이 관철된 부분이다. 기시다 시대에서는 1990년대 이전의 메이저 파벌 영향력이 강화하면서 아베 시대와는 달리 ‘관저 주도’ 정치는 약화했다.

일각에서는 아베의 사망 이후, 특히 참의원 선거의 승리로 기시다 정권의 색깔이 강해질 것으로 예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베의 사망으로 자민당 내 파벌 역학의 불투명성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기시다가 여유를 가지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아베는 기시다의 견제자이기도 하지만 지원자이기도 했다. 아베가 없으면 자민당을 장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다.

앞으로 아베의 계승자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파벌 역학이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보수의 심장을 누가 계승할지에 따라 일본 정치권의 흐름도 변화할 것이다. 아베에 대한 동정론 속에서 아베의 이데올로기나 정책을 계승하려는 경쟁이 당분간 유지될 가능성 또한 크다.

아베 피격 사망이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압승을 도운 것으로 분석되는 만큼 앞으로도 정국 운영에서 아베의 그림자를 무시하기는 힘들다. 2년 후 차기 총재선거에서 아베 파벌이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기시다 정권의 운명도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기시다는 아베 파벌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기존 정책을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한·일 관계 유산

세계 각국이 아베 사망에 따라 가장 관심을 곤두세우는 분야는 일본의 외교정책이나 대외전략의 변화 여부다. 사실 일본의 역대 그 어떤 지도자도 아베만큼 해외 지도국 정상들과 밀접한 관계나 파이프라인을 형성했던 인물은 없었다.

인도와 태평양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역설했던 첫 정치인이 바로 아베다.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넘어선 미국의 인·태 전략이 여기서 태동했다. 보수의 심장이자 우파의 상징인 아베가 없는 상황에서 자민당 우파가 동북아 정세에 일대 파문을 일으킬 개헌을 적극 추진해 성과를 낼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아베의 부재가 가장 민감하게 다가오는 나라는 한국이다. 기시다 정부가 한·일 관계에서 아베의 부정적 유산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사실 아베가 남긴 한·일 관계 유산은 부정적인 측면이 많다. 한국으로서는 양국 관계의 악화를 경험했고, 일본으로서도 아베 외교의 유일한 실패로 불렸다.

특히 과거사 문제에 대한 아베 정권의 역사수정주의 인식과 강경 일변도의 대한 정책은 한·일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남겼다. 역사수정주의 정책은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더 이상 없다’는 것으로 이해됐고, 이는 ‘한국과 안이하게 타협하면 안 된다’는 대한 강경론으로 이어졌다. 대한 수출 규제는 국제정치·경제의 불투명성이 커진 상황에서 양국 협력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

비록 아베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의 세례를 받은 우파 내셔널리즘으로 무장한 대한 강경론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아베의 유산은 당장 변경하기 어렵다. 최소한 당분간은 기시다 정권이 한·일 관계 개선에 전향적 자세를 보이기 어려울 것으로 관측되는 이유다.

◇현실적 인식 필요

현재로는 아베의 사망을 계기로 한·일 관계가 좋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다. 과거사 문제에서 완전한 해결을 보려는 것도 성급한 태도다. 이보다는 현금화 조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를 모색하면서 다른 분야의 협력을 적극화시키는 쪽으로 나아가는 게 맞는다. 무엇보다 한·미·일 안보 문제와 관련해 보다 현실적 인식을 갖고 협력 확대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전 현대일본학회 회장

■ 용어 설명

‘역사수정주의’는 역사적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기존 통설에 수정을 가하려는 움직임 또는 그런 사고. 일제 때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거나 6·25전쟁을 내전으로만 보는 것 등이 이에 속함.

‘관저 주도’란 일본 총리 관저(한국의 대통령실에 해당)에 의한 국정 주도. ‘관저 관료’로 불리는 아베 측근들이 국정을 주도하고 톱다운 의사결정을 취하는 것으로, 아베 장기 집권의 배경이 됐음.

■ 세줄 요약

보수의 심장 아베 : 역대 최장 정권을 기록했던 아베는 우파의 상징이자 일본 ‘보수의 심장’임. ‘관저 주도’ 정치로 ‘아베 1강’ 체제를 완성했던 만큼 영향력이 컸으나 부정적 유산도 일본 정치의 과제로 남음.

아베의 강한 흔적 : 아베의 세례를 받은 우파 내셔널리즘은 재생산되고, 역사관과 아베노믹스 등 정책은 전승되고 있음. 기시다 정권은 앞으로도 아베 파벌을 최대한 배려하면서 기존 정책을 유지하려 할 것.

한·일 관계 유산 : 아베의 강경한 역사수정주의는 한·일 관계에 그림자를 남김. 아베 사망을 계기로 양국 관계의 급속한 진전을 기대하는 건 시기상조. 우선은 한·미·일 안보 협력 확대부터 모색할 필요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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