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직원 횡령에 피멍 드는 재계
만연한 모럴해저드, 개인 아닌 사회현상이라는 지적도
(시사저널=박창민 기자)
재계에서 직원들의 횡령 사건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사기업은 물론 은행과 관공서에 이르기까지 사고가 나지 않는 영역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직원들이 횡령한 금액도 만만치 않다. 최소 수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에 이른다. 수년 동안 들키지 않고, 회삿돈을 뒷주머니에 챙겼다는 점도 충격적이다. 이 때문에 기업 내부 통제와 감시 체계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울러 횡령한 직원들이 대부분 빼돌린 회삿돈을 주식과 가상화폐 투자 등으로 날렸다는 점도 주목된다. 지난 몇 년간 몰아친 주식 투자 광풍이 한탕주의를 부추긴 결과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7월6일 현대제철이 뜬금없이 사내 횡령 사건에 대한 감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직원들이 유령회사를 차려 100억원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사내 익명 게시판에 제기되면서다. 게시글에는 현대제철 일반직과 기능직이 조직적으로 유령회사를 설립해 와류방지기 등 조업용 부품 단가를 부풀리거나 허위 발주를 통해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현대제철은 지난해에도 직원이 철강 제품 공정에 쓰이는 부원료인 니켈을 100여 차례에 걸쳐 총 75톤가량을 빼돌려 고물상에 판매해 10억원이 넘는 이득을 챙긴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횡령 범죄 10년 사이 117% 증가
현대제철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기업들의 횡령 사건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상장사 역사상 최대 규모인 2215억원의 횡령 사고가 터진 오스템임플란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오스템임플란트 재무팀장이었던 이아무개씨는 회사 계좌에서 자신 명의 증권계좌로 15회에 걸쳐 총 2215억원을 이체해 주식 투자 등 개인 용도로 임의 사용한 횡령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범행이 드러나자 이씨는 잠적했지만, 1월5일 경찰은 압수수색영장 집행 과정에서 은신하고 있던 이씨를 체포했다. 이 외에도 올해 들어 △계양전기(245억원) △아모레퍼시픽(30억원) △클리오(19억원) △롯데(7000만원) 등에서 직원들의 횡령 사건이 발생하면서 기업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사기업뿐만 아니라 금융권과 관공서에서도 횡령 사건이 발생해 공분을 샀다. 우리은행 본점 직원은 문서를 위조해 614억원을 빼돌렸다. KB저축은행(94억원), 새마을금고(40억원), 신한은행(2억원) 등에서도 횡령 사건이 터져 나왔다. 공공기관에서는 서울 강동구청 공무원이 115억원을 빼돌려,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공기업 한국수자원공사 직원이 수년간 85억원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박재현 한국수자원공사 사장은 국회에서 머리를 숙여야 했다.
특히 금융권에서 일어난 횡령 사건은 장기간에 걸쳐 진행됐다는 점에서 충격을 안겼다. 우리은행의 경우 직원이 6년간 무려 614억원을 가로챈 사실이 10년 만에 드러났다. 새마을금고 직원의 범행기간은 16년이었고, KB저축은행 직원은 6년간 자금을 빼돌렸다.
내부 횡령 사건이 잇따라 불거지면서 그 후폭풍이 기업과 금융권 전반에 불어닥치고 있다. 오스템임플란트는 횡령 사건이 불거지자마자 주식 거래가 정지됐다. 지난 4월 주식 거래가 재개되긴 했지만, 오스템임플란트의 소액주주들이 회사 관계자와 회계법인 등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을 청구하면서 송사에 휘말렸다. 올해 초 금융감독원의 종합감사를 마친 우리은행은 지난 4월 본점 직원이 600억원대 회삿돈을 빼돌린 사실이 드러나면서, 또다시 금감원의 수시검사를 받아야 했다. 우리은행은 금감원의 종합감사와 수시검사 결과를 합쳐 강도 높은 제재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듯 횡령 사건은 기업에 치명적인 리스크를 초래한다.
이처럼 올해 상반기 재계 이슈를 돌아보면 '직원 횡령'을 빼놓을 수 없다. '대횡령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다. 실제로 횡령 관련 범죄 건수도 증가했다. 통계청 자료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횡령 범죄 발생 건수는 2011년 2만7882건에서 2020년 6만539건으로 2배 이상 늘었다. 10년 만에 횡령 사건이 117% 증가한 것이다. 아울러 올해처럼 기업 횡령 사건이 한 달에 한 번꼴로 터져 나오는 건 좀처럼 보지 못한 현상이다. 올해 들어 유독 기업과 금융권 횡령 사건이 많이 터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한 재계 관계자는 "사실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기업 내부에서는 이런 사건이 너무 많다. 대부분 유야무야 넘어가고, 덮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면서 "하지만 오스템임플란트 2000억원 횡령 사건이 불거지면서 기업 내부 통제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기업들도 뒤늦게 강도 높은 내부 감사를 하는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사건·사고가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답했다.
"금융 당국의 관리·감독 소홀도 문제"
금융권에서 은행 횡령 사고가 이처럼 많이 발생하는 것은 우리은행 횡령 사건 이후 내부 통제가 강화됐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선 은행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관계자는 "우리은행에서 사고가 터지고, 금감원에서 수시검사가 들어오면서 은행권도 강도 높은 자체 감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해묵은 직원들의 일탈이 드러난 것"이라며 "돈을 만지는 은행에서 횡령 사고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그동안 내부 통제가 소홀했던 것도 사실이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민간·공공 영역을 망라하고 횡령 범죄가 줄줄이 터지는 가장 큰 원인으로 조직 내부 통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점을 언급했다. 특히 준법윤리경영과 기업 컴플라이언스를 강화해 내부 횡령에 대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아울러 은행을 관리·감독하는 금융 당국도 그 역할을 그동안 제대로 못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횡령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내부 통제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은행을 포함한 금융권에서 거액의 금융 사고가 지속 발생하고 있다. 금융 산업은 고객의 신뢰가 생명이므로 금융 사고에 더욱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며 "최근 자산시장의 가격 급등락 등으로 금융 사고 발생 위험이 커질 수 있는 만큼 사고 예방을 위한 내부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 횡령 사건에 대한 낮은 처벌 수위도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현행 형법상 양형기준은 횡령액 50억원 이상 300억원 미만까지는 기본 징역 4~7년이며, 횡령액 300억원 이상일 경우 기본 5~8년 징역형을 받는다. 이 때문에 '크게 수백억원 횡령해 처벌받은 후 숨겨둔 돈으로 호화롭게 살면 되는 거 아니냐'는 조소도 나온다. 이 때문에 사회 구성원들의 낮은 책임의식과 윤리의식도 횡령을 부추긴다는 평가다.
사고 이면의 '한탕주의'와 노동 경시 풍조
일각에서는 피의자들의 횡령 배경에는 노동 수입이 경시되는 소위 '한탕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직원들이 빼돌린 회삿돈을 불법도박과 주식, 코인 등에 투자했다가 날렸다는 점에서 나온 말이다. 오스템임플란트 직원과 강동구청 공무원은 각각 횡령액 중 1000억원 이상과 77억원을 주식 투자로 탕진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은행 직원 역시 횡령액 가운데 300억원 이상을 고위험 파생상품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본 것으로 나타났다. 농협 직원은 회삿돈으로 가상화폐 투자와 외제차 등 사치품을 구매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제철 직원 역시 횡령한 회삿돈으로 즐긴 호화스러운 일상을 SNS에 올렸다가 덜미가 잡혔다.
말 그대로 횡령 피의자들은 크게 '한탕'하려다가 적발된 셈이다. 월급만으로 내 집 마련조차 힘겨워진 시대에 불로소득을 위해 거액의 회삿돈을 횡령해 투자에 활용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아울러 최근 몇 년 동안 주식, 코인 열풍이 불면서 투자 성공사례가 매스컴에서 조명되고 있다. 또 이른 은퇴를 하는 '파이어족'이 늘고, 이를 동경한 그릇된 한탕주의가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 때문에 이 같은 사회현상을 마냥 개인의 일탈과 기업의 관리 부실로만 취급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기 미거래 계좌 15조원…횡령 사고 '뇌관' 되나
국내 4대 은행에서 1년 이상 입출금거래가 전혀 없는 예금이 15조8000여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 장기 미거래 계좌가 횡령 사고의 뇌관이 될 수 있는 만큼 계좌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한정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3월말 현재 KB국민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등 4대 은행에서 1년 이상 입출금거래가 전혀 없는 장기 미거래 예금은 모두 15조7676억원으로 나타났다.
기간별로는 1년 이상 3년 미만이 11조2513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5년 이상 거래가 전혀 없는 예금도 2조3818억원에 달했다. 예금 잔액별로는 1억원 미만이 9조7152억원에 이르고, 5억원 이상의 장기 미거래 예금도 3조2716억원에 달했다.
김한정 의원은 "장기간 거래가 없는 예금은 담당자가 마음먹고 서류를 조작해 자금을 빼돌리면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면서 "최근의 금융 사고가 오랫동안 이뤄졌다는 점에서 장기간 거래가 없는 계좌에 대한 관리 부실 등 내부 통제 제도의 미비가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우리은행 직원의 600억원대 횡령 사고는 10년 만에 드러났다. 새마을금고 직원의 범행도 16년 만에 최근 적발됐다. KB저축은행 직원은 6년간 자금을 빼돌렸다. 내부 통제 시스템이 미비하면 내부 직원이 작심하고 저지른 횡령 등 금융 사고를 찾아내기 어렵다는 점을 방증해 주는 대목이다.
이 때문에 김 의원은 "장기 미거래 예금에 대한 관리 체제를 전면적으로 재점검해 금융 사고 가능성을 사전 예방해야 한다"면서 "감독 당국도 금융권의 금융 사고 예방을 위한 내부 통제 실태를 점검하고 제도 보완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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