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클래식 선봉 선우예권 "더 좋은 연주 갈망하는 마음 커져"
'가능성 있는 친구'로 임윤찬 소개
한국인 최다 '콩쿠르 8관왕' 기록
"그 전엔 조급함, 이젠 인내심 생겨"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으로 새삼 그 진가가 재확인된 피아니스트가 있다.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한 선우예권(33)이다. 이 대회 한국인 최초 우승자였으니, 임윤찬의 ‘우승 선배’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년 전 결선에서 연주한 곡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임윤찬과 똑같은 선곡이었다. 선우예권은 ‘직전 대회 우승자’ 자격으로 이번 콩쿠르 개막 만찬에 참석했고, 짧은 연설과 함께 연주 순서를 정하는 번호표도 뽑았다. 그는 만찬장에서 임윤찬을 ‘가능성 있는 친구’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지난 7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선우예권을 만났다.
“윤찬이 경연을 온라인으로 인상 깊게 지켜봤어요. 우승 예감이 들더군요.” 그는 “우승 소식을 듣고 윤찬이에게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며 “콩쿠르 내내 그렇게 좋은 퀄리티를 유지하며 연주해낸다는 건 대단하고 대견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19년 ‘명동성당과 함께하는 영 피아니스트’ 시리즈에서였다. 이 프로그램의 예술감독이던 선우예권이 7명의 젊은 피아니스트를 추천했는데, 당시에도 15살 임윤찬이 가장 어렸다. “이번 콩쿠르에서 만났을 때 윤찬이가 수줍게 웃더군요. 그런데 예전엔 지금보다 더 숫기가 없었어요. 말수도 적었고요.”
선우예권은 이른바 ‘케이(K)클래식’의 선봉에 있다. 그의 별명은 ‘피아노 콩쿠르 국가대표’. 한국인 피아니스트 최다 국제 콩쿠르 우승 기록 보유자가 바로 그다. 센다이 콩쿠르,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어워드 등 7개 국제 콩쿠르에 이어 반 클라이번 콩쿠르까지 제패해 ‘콩쿠르 8관왕’에 올랐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2년여 만에 찾아온 코로나 팬데믹은 ‘콩쿠르 부자’인 그에게도 좌절을 안겼다. 잡혔던 국내외 공연 일정이 속속 취소됐다. “연주가 계속 취소될 때는 피아노 연습도 하지 않았어요. 피아노를 치다 보면 공연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졌거든요. 그러다 보니 2개월 동안 아예 피아노 건반을 건드리지 않은 시기도 있어요.” 다행히 올해 들어 코로나가 잦아들면서 다시 국내외 공연이 활발해졌다. 상반기에 미국과 폴란드, 일본 공연 투어를 마쳤고, 하반기엔 포르투갈(7월)과 스위스(8월), 이탈리아(9월) 음악축제 무대에 오른다. 국내 일정도 빽빽하다. 지난달엔 베이스 연광철과 슈베르트의 연가곡집 ‘겨울나그네’를 연주했고, 슈베르트 곡들로 채운 별도 리사이틀도 열었다. 지난 5일엔 몬트리올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고, 다음 달엔 대만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레이 첸과 듀오 콘서트가 잡혀 있다. 오는 23일 하는 서울 마포아트센터 리사이틀은 선곡이 특히 눈길을 끈다.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들이 중심이다. 그는 “자주 연주되지 않지만 가장 좋아하고 들려주고 싶은 곡들을 골랐다”고 말했다. “슈트라우스 곡들은 화성이 독특한데 소리로 마법을 부리고,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뇌에 자극을 줘요. 단조로운 듯한 멜로디가 각양각색의 감정을 전달하면서 애수에 젖게도 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피아노를 쳤으니 일찍 시작한 편은 아니다. “누나 둘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녔는데, 저도 보내달라고 부모님께 졸랐어요. 안양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동네 피아노 학원이었는데 선생님이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원석 같은 아이니까 계속 음악을 시켜보라’고 어머니께 권유했대요.” 중학교 과정인 예원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예원학교, 서울예고 모두 수석 입학·졸업했고, 전액 장학생으로 커티스 음악원, 줄리아드 대학원에 진학했다.
유학 시절, 학비는 장학금을 받았다지만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마다 콩쿠르에 도전했고, 우승 상금이 큰 힘이 돼주었다. “유학 시절엔 집에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어요.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상금이 2만~3만달러 정도였는데 1년치 집 전셋값과 생활비는 되더라고요.” 그는 “당시 ‘생계형 콩쿠르 출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2015년 쇼팽 콩쿠르는 그에게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 있다. 예선 참가자 160명 가운데 84명을 뽑는 본선 진출 티켓을 따내지 못했다. 당시 이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을 비롯해 한국인 피아니스트 9명이 진출했는데,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가 탈락한 건 뜻밖의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제가 계획을 잘못 세웠어요. 2주 전에 곡 변경이 가능한 줄 알고 이메일을 보내 다른 곡을 치겠다고 했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연주한 곡이 새로운 곡인데 연습을 3시간이나 했을까요.” 연주한 날이 인터내셔널 저먼 피아노 어워드 우승 바로 다음 날이어서 연습할 시간도 부족했다. 그는 당시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제가 생각해도 정말로 못 쳤어요. 준비를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적어도 한두달 이상은 집중해야 하는데, 약간 가볍게 봤죠. 간절하게 준비하지 않았어요. 제가 생각이 없었던 거죠.” 이때의 경험이 2년 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에 밑거름이 됐다. “그 전 다른 콩쿠르 때보다 엄청나게 집중해서 준비를 많이 했어요. 음악이라는 게 무르익는 시간이 필요해요. 가볍게 해서는 절대로 제대로 된 음악이 나오지 않는 거죠.”
그는 레퍼토리가 다양한 연주자로 꼽힌다. 비교적 곡을 빨리 익혀 연주하는 편이다. 새로운 곡도 2~3일이면 외워서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어도 어쨌든 협연을 할 정도는 된다고 했다. 요청이 들어오면 1주일 안에 협연할 수 있는 협주곡이 20여곡에 이른다. “브람스 협주곡 1번을 특히 좋아해요. 베토벤 협주곡에선 4번을 제일 좋아하고, 3번, 5번도 좋아요. 라흐마니노프와 프로코피예프 협주곡도 좋아합니다.” 그는 좋아하는 피아니스트로 루마니아 태생의 라두 루푸와 이탈리아 출신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를 꼽았다. 지난 4월 작고한 라두 루푸가 1965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다. 좋아하는 작곡가는 슈베르트. ‘죽기 전에는’ 슈베르트의 후기 피아노 곡들을 연주한 음반을 내놓고 싶단다.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이후 5년, 그의 음악은 어떻게 변했을까. “글쎄, 음악이 조금 더 성숙해졌다고 생각하고 싶네요. 그 전엔 조급함이 있었는데 이제는 인내심 같은 게 생긴 것 같아요. 더 좋은 연주를 갈망하는 마음이 그때보다 더 커진 것 같고요.” 그는 “공연을 많이 하게 되면 지칠 수밖에 없는데 음악에 대한 욕심이 커진 건 다행”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연주를 계속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가장 큰 꿈이고 목표예요.” 10년 뒤 목표를 묻자 “연주 말고 다른 걸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며 오로지 피아노 연주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비쳤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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