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기의 D사이언스] "반도체 위기, 지난 10년 투자 공백 탓.. 산학연 협력만이 살길"
반도체 학과 정원만 늘린다고 해결 안 돼
기업 장비 공유 등 산학 개방형혁신 필요
시스템반도체 원천기술 확보도 힘모아야
이준기의 D사이언스 김덕기 한국연구재단 나노·반도체단장
"10년간의 '반도체 투자 공백기'가 결정적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요. 반도체 인력 양성, 산업계 연계, 교수 수급, 장비 확보 등 우리 반도체 생태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이 2010년부터 거의 10년 간 대학과 연구기관에 대한 반도체 투자가 줄어들면서 불거졌다고 봅니다."
세계적인 반도체 소자 전문가로 인정받는 김덕기 한국연구재단 나노·반도체단장은 우리가 당면해 있는 반도체 생태계의 다양한 문제점이 미래를 내다보지 않고, 산업체만 믿은 채 대학, 연구기관에 선제적 투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산업체는 미래 혁신 기술 확보를 위한 미래 R&D 투자에 적극 나서지 않았고, 정부 역시 반도체 관련 투자에 안일하게 대처했다는 지적이다.
그는 "2010년대 이후 대학에서 반도체 관련 연구를 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투자와 지원이 많이 줄었다"며 "이때부터 거의 10년 간 대학 교수들은 반도체 연구 대신 이와 유사한 디스플레이, 태양전지 연구를 해야 했고, 대학 내 반도체 장비와 시설이 부족해져 학생들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산업계는 반도체 인력을 채용해도 1∼2년 간의 현장 실습과 재교육을 거쳐야 실무에 투입할 수 있어 인력 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 세계가 반도체 공급망 이슈에 발목이 잡혀 경험해 보지 못한 홍역을 심하게 앓고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반도체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프를 들고 나와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을 천명한 데 이어, 지난 5월 한미 정상회담 때는 삼성전자 평택반도체 공장을 가장 먼저 찾아 반도체 산업 육성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에 차질이 생기면서 차량용 반도체 수급에 어려움을 겪었고, 디지털·온라인 가속화에 따른 반도체 수요 급증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반도체 산업 생태계에 치명적 영향을 받았다.
김 단장은 "4차 산업혁명과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 속에서 반도체가 기술을 넘어 경제·안보·외교 영역 등으로 확장하면 국가전략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높여가고 있다"며 "느슨해진 산학연 협력을 개방형 혁신을 통해 더욱 단단히 졸라매고, 고부가치 분야인 시스템반도체 설계 등에 대한 투자 확대와 산학연 간 차세대 반도체 R&D 강화를 통해 '초격차 반도체 강국'의 면모를 갖춰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이준기 ICT과학부 차장
◇"2010년대 '반도체 10년 투자 공백기' 결정적 패착"=김 단장은 반도체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줄어들기 시작한 2010년 이후 10년 간 소위 '반도체 투자 공백기'가 국내 반도체 산업 생태계에 악영향을 줬다고 언급했다.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반도체 인력양성과 교수 연구지원에 큰 부족이 없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최근까지 정부는 산업계만 믿고 투자에 소홀했고, 산업계 역시 대학과 연구기관 간 협력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실질적인 산학연 협력이 이뤄지지 안았다.
그는 "반도체 산업 생태계가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한 산업계 주도로 재편되다 대학과 연구기관 간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대학에서도 투자가 줄어 반도체 교수를 지속적으로 채용하지 못해 산업체가 요구하는 현장 실무형 인력 양성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문제가 국가 산업적 문제로 부각되자, 새 정부는 반도체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반도체 우수 인재 양성에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반도체 전문가인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직접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과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반도체 특강을 할 정도로, 국가 차원의 반도체 강력한 지원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도체 교수들은 반도체 인력 부족뿐 아니라 학생들을 가르칠 대학교수 수급 어려움, 실험·실습을 위한 장비 및 기자재 부족 등을 호소하고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 부족한 인력은 1년에 3000여 명 수준으로 파악된다. 협회는 향후 10년간 누적 부족 인력이 3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전국의 반도체 연구 교수는 400∼500명에 불과하며, 서울대 공대 교수(330명) 중 반도체를 주력으로 연구하는 교수는 고작 10여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김 단장은 "디지털 전환 가속화 등에 따라 반도체는 기술, 경제, 안보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국가전략기술로 역할을 할 것"이라며 "미래를 내다보며 국가 차원의 중장기 반도체 투자를 지속적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산학연 협력 강화'로 '랩 투 팹 기술' 연계=김 단장은 대학과 연구기관, 산업체 간 기술 협업을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핵심 원천기술을 연구하는 대학·연구소가 실험실 기술의 상용화를 위해 대규모 양산을 맡고 있는 산업계와 유기적 협력체계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대학과 연구소에서는 단위 소자 수준의 연구는 활발하게 이뤄지는 데 반해, 이를 산업체의 제품화로 연계하는 협력체계가 원활히 작동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장비, 시설 등 인프라 측면에서 산업체에 한참 뒤져 있는 대학이 개발한 기술과 산업체가 요구하는 기술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는 이른바 '기술 미스매치 현상'도 존재한다.
김 단장은 "아무리 대학과 연구소 실험실에서 우수한 기술을 개발해도 첨단 산업의 반도체 공정에 적용하기란 상당히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이런 기술 미스매치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산학연 기술 협업을 강화라는 '랩 투 팹' 전략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산업체가 원하는 상용화 기술을 대학과 연구기관이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다양한 정부 R&D과제 기획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나라가 반도체 기술의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강화하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욱 산학연 간 교류폭을 넓히고 고도화해야 국내 반도체 기술과 반도체 분야의 인재양성 등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학과 정원확대 능사 아냐…산학협력으로 해결해야"=김 단장은 정부가 반도체 우수 인력 양성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학과 정원 확대가 자칫 임시방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시했다. 일부 대학들이 요구하고 있는 반도체 학과 정원 확대가 우수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는 데 능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학과 정원이 늘어나면 서울 소재 대학과 일부 대학 등으로 학생 쏠림 현상이 더 커져 반도체 인력 생태계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반도체 학과 정원 확대는 일시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몰라도 부족한 반도체 인력 수급과 우수 인재 양성의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 될 수 없다"며 "기존 전자공학과 등에 반도체 트랙을 두고 반도체 관련 교육을 동시에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향후 있을 수 있는 반도체 인력 과잉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지금 대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반도체 인력 양성은 긴밀한 산학 협력 채널을 다시 가동해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단장은 "장비, 시설 등 열악한 교육 인프라 환경에서 공부한 학생들을 산업체에 배출한다 해도 산업체 입장에서 이들을 곧바로 실무 현장에 투입할 수 없는 비효율적 측면이 있다"며 "이런 반도체 인력 생태계의 한계를 해소하기 위해선 산업체의 장비와 시설 등을 대학에서 공동 활용할 수 있도록 보다 고도화된 산학 개방형 혁신을 강화한다면 지금보다 우수한 반도체 인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스템반도체 설계 등 고부가치에 선택·집중해야"=김 단장은 시스템반도체 설계와 메타버스 등 반도체 응용 분야의 원천기술 확보를 통해 기술 주도권을 잡아야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고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비메모리 분야인 시스템반도체, 팹리스, 파운드리 등에선 미국, 대만, 중국 등에 뒤처져 있는 상황이다.중국의 매서운 추격을 받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초격차 기술력을 유지하면서, 상대적으로 우리가 취약했던 비메모리 분야 중 시스템반도체 설계와 같은 고부가가치 분야로 눈을 돌려서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메모리 분야는 인건비, 제조단가 등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메모리 분야에서 벗어나 반도체 산업의 제일 윗단에 있는 인텔, 엔비디아, 퀄컴, 암(ARM) 등이 주력하고 있는 시스템반도체 설계나, 이를 메타버스 등 신산업에 활용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는 분야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에서 기술격차를 좁이며 단기간 내 대만의 TSMC를 추격했듯이 지속적인 투자와 R&D 확대를 바탕으로 비메모리 분야에서 우리나라는 새로운 강자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게 김 단장의 판단이다.
김 단장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얘기했듯이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 셋째도 기술이 좌우하는 시대가 반도체 생태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며 "산학연이 차세대 반도체 원천기술 개발에 공동으로 나서 반도체 전 주기에 걸쳐 미래 원천기술을 확보하고, 이를 산업체의 양산에 적용할 수 있는 산업화 플랫폼 구축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준기기자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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