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항로 개척' 상징이자 '식민시대' 근원지.. 대지진에 무너진 황금도시

기자 2022. 7. 11.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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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전경.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인 리스본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도시 재생에 힘을 쏟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리스본 바이루 알투 지구 골목 모습. 게티이미지뱅크

■ 지식카페

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 (17) 해상무역 요충지 ‘리스본’

이슬람 점령 벗어난 후 1243년 포르투갈 수도로

바스쿠 다가마·콜럼버스·마젤란 등 탄생 시킨 ‘항해의 성지’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서 약탈한 富로 종교시설 황금화

1755년 재앙에 도시건물 85% 파괴되며 쇠락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포르투갈 시인 루이스 드 카몽이스는 유라시아 대륙이 대서양 푸른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수직 절벽에 서서 바다를 향해 노래했다. 대서양 항로가 개척되기 전, 리스본은 유럽의 땅끝마을, 로마인의 표현에 따르면 ‘먼 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이베리아반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테주강 하류의 리스본에는 약 75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 유럽인들은 오랫동안 이 아름다운 도시가 올리시포, 즉 오디세우스가 건설한 전설 속 도시라고 믿었다. 그러나 리스본을 건설한 이들은 켈트인이다. 약 3200년 전, 그들은 이곳을 저주에 걸려 하반신이 뱀으로 변한 물의 요정 모우라(moura)의 도시로 만들었다. 땅끝의 수호신인 이들은 항해자들을 향해 저주를 풀어주면 보물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예부터 리스본은 지중해-대서양-북해를 잇는 무역으로 번영했고, 711년 이슬람 점령 후에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잇는 경계지대로 이득을 얻었다. 이베리아 레콘키스타의 결과, 1147년 리스본은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났고, 1243년엔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가 됐다. 나라 전역에서 마녀사냥의 광기가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리스본인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리스본 상인은 여전히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 베네치아의 무역업자, 북유럽 한자 동맹의 상인 등과 밀접한 거래 관계를 유지했다.

이슬람 점령기 동안, 리스본 사람들은 바다 너머 아프리카에 다채롭고 풍요로운 산물이 쌓여 있음을 잘 알았다. 모우라가 약속한 바다 너머 부에 대한 환상이 그들을 유혹했다. 바다를 건너가 아프리카의 황금, 인도의 향신료,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등을 가져올 무역로를 열고 싶었다. 13세기 초, 유혹을 못 이긴 이들은 아프리카 해안선을 타고 카나리아 제도에 이르는 대서양 항해를 시작했다.

1415년 엔히크 왕자가 모로코 세우타를 점령하자 탐험에 불이 붙었다. 벤 윌슨의 ‘메트로폴리스’에 따르면, “아프리카 나머지 모든 도시의 꽃”답게 “세우타 상인들은 대궐 같은 집에 살았고, 아프리카의 금과 상아, 노예, 아시아산 향신료를 취급했다.” 종교적 열정이 부의 열망과 만나자 대서양 탐험이 국가의 미래가 됐다.

연구 투자 없이 부를 만드는 방법은 없다. 1418년 엔히크 왕자는 세계 최초의 과학 연구소를 설립해 대서양 연구를 시작했다. 리스본은 “탐험으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과 세상 변화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성지”가 됐다. 이베리아의 수학자와 선박 업자 등은 이슬람 천문학자, 유대인 지도 제작자, 베네치아 선장, 스칸디나비아 상인, 아프리카 현자 등과 어울려 자유롭게 토론을 벌였다. 엔히크 연구소는 리스본판 ‘지혜의 집’이었다. 이들은 세계지도를 제작하고, 항해술을 발명하고, 강력한 대양용 선박을 건조했다. 이들이 만든 지도와 배가 없었다면, 인도항로를 발견한 바스쿠 다가마도, 대서양항로를 연 콜럼버스도,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도 존재할 수 없었다.

15세기 초, 리스본인들은 대서양에서 마데이라섬을 발견하고, 사탕수수 농장을 세워 비싼 설탕을 유럽에 공급했다. 1487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고, 1497년 바스쿠 다가마는 잔지바르를 거쳐서 드디어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했다. 1499년 향신료를 싣고 리스본으로 돌아온 다가마는 항해 비용의 60배나 이득을 남겼다. 세계사의 운명이 바뀐 순간이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에서 카몽이스는 캐러벨을 타고 바다로 나간 포르투갈 오디세우스들을 찬미했다. “드높은 명성의 용사들이/ 루지타니아의 서해안으로부터,/ 누구도 항해한 적 없었던 바다를 통해/ 타프로바나 너머까지 진격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는/ 위험과 전투를 극복하며/ 먼 이방의 세계에서/ 저토록 고귀한 새 왕국을 세웠도다.”

그러나 ‘저토록 고귀한 새 왕국’은 동시에 야만과 유혈의 왕국이었다. 인도양 대도시의 운영 원리와 복잡한 교역망을 ‘최후의 십자군’ 다가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도로 돌아온 그는 가져간 상품이 팔리지 않자 이슬람의 음모라는 생떼를 부리면서 최첨단 무기인 함포를 사용했다. 캘리컷을 포위한 다가마는 포격을 퍼부어 도시를 폐허로 만든 후, 포르투갈 왕을 ‘바다의 제왕’으로 선포하고 면허장을 발급해 인도양 무역상들에게 ‘삥’(?)을 뜯었다. 한 이슬람 지도자는 말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지 못한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서양 제국주의의 출발이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돌뗏목’에서 포르투갈을 유럽 대륙에서 떨어져 나와 “브라질과 아프리카에 닻을 내리는 거대한 뗏목”에 비유했다. 리스본이 그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바다를 정복한 대가로 리스본은 세계 무역의 중심으로 빠르게 떠올랐다. 이 도시는 진정한 의미로 최초의 해양 제국주의 도시였다. 리스본인들은 마카오, 고아, 코친, 믈라카, 말루크, 사우바도르 등 전 세계 식민도시에서 무자비하게 부를 약탈해 강변 궁전, 제로니모스 수도원, 벨렘탑 등을 이국 취향의 마누엘 양식으로 화려하게 짓고, 교회와 수도원을 황금으로 뒤덮었다. 리스본엔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브라질에서 들여온 직물, 융단, 염료, 상아, 소두구, 후추, 정향, 계피, 금이 넘쳐났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이후 영국·네덜란드 등과 치열한 ‘향신료 전쟁’을 치르는 첨단 제국주의 도시이자 가톨릭 보수주의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리던 리스본에 갑자기 파멸의 날이 찾아온다.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도시 앞바다에서 대지진이 일어난 것이다. 땅이 흔들리고 쓰나미가 덮치면서 황금의 도시 리스본은 철저히 파괴된다. 건물의 85%가 무너지고 주민 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신의 영광’이 다한 것이다.

대지진은 물리적·경제적 충격과 함께 유럽 사회에 정신적 충격을 줬다. 소식을 접한 볼테르는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엄마 품에 안긴 채 짓눌려 피 흘리는/ 아이들은 무슨 죄악을, 무슨 과오를 범했단 말인가?/ 환락 속에 잠겨 있는 파리나 런던보다/ 리스본의 악행이 더 심했단 말인가?”라고 신에 대한 회의에 빠져 울부짖었다. 숙고 끝에 그는 ‘캉디드’에서 “지금은 우리의 정원을 가꿀 때”라는 결론을 내린다. 칸트 등이 계몽에 동참하면서 신의 은총만 바라는 신앙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경험과 진리를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계몽주의가 유럽 전역에 들불처럼 퍼져나간다.

잿더미로 변한 리스본도 신앙의 도시에서 이성의 도시로 탈바꿈한다. 수습을 맡은 품발 후작은 리스본을 철저한 도시계획에 따라 유럽의 관문이자 문명 세계의 상징으로 재건하고, 세력이 위축된 귀족과 교회를 척결해 포르투갈을 중상주의에 바탕을 둔 절대 왕정 국가로 변화시키려 애쓴다. 이로써 리스본과 포르투갈은 후에 파리, 런던 등 여러 나라의 도시계획과 근대국가 제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리스본은 인도항로를 개척해 중세를 무너뜨렸고, 자신을 제물로 삼아 신앙이 지배하는 세계를 파괴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루이스 드 카몽이스에게’에서 노래했다. “나는 알고 싶네./ 네가 최후의 강변인 그곳에서/ 겸허하게 깨달았는지./ 잃어버린 모든 것, 서구와 동방, 창검과 깃발이/ 네 루지아디스판 아이네이스 속에서만/ (인생사 우여곡절과는 무관하게) 영속하리라는 것을.” 19세기 중반 거대 식민지 브라질이 독립하면서 리스본은 파두의 슬픈 음조와 함께 몰락에 접어든다. 20세기 중반 ‘더러운 전쟁’ 끝에 고아를 인도에 돌려주고, 앙골라, 모잠비크 등 아프리카 식민지도 상실하면서 리스본은 세계사의 무대에서 잊힌 도시로 전락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영혼의 고향 리스본을 아련한 어조로 우리에게 안내한다. “물길로 오는 여행자라면 아주 멀리서도, 햇살에 금빛으로 물드는 푸른 하늘로 떠오르는 또렷한 꿈속의 한 장면 같은 이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돔과 기념비와 고성들이 주택들 위로, 이 아름답고 축복받은 도시의 전령처럼 아스라이 늘어서 있다.”

1910년 포르투갈은 공화제로 전환했고, 1926년 쿠데타 이후 오랫동안 살라자르 독재에 시달리다가 1974년 청년 장교들의 군사혁명을 통해 간신히 민주화됐다. 1994년 유럽 문화 수도 지정 이후 리스본은 도시재생에 몸부림치고 있으나, 모우라의 보물을 되찾을 길은 아직 뚜렷지 않다.

문학평론가

■ 용어설명

레콩키스타(reconquista)

스페인어로 ‘재정복’을 뜻한다. 711년 이슬람 우마이야 제국이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한 후, 유럽 기독교 세력이 지속해서 벌인 국토 회복 활동을 의미한다. 포르투갈 지역은 12세기 ‘정복왕’ 아폰수 1세의 지휘 아래 리스본, 팔멜라 등을 정복했고, 그 와중에 1143년 카스티야 왕국에서 갈라져 독립 왕국을 건립했다. 포르투갈의 레콩키스타는 1249년에야 끝났다.

마누엘 양식(Manuel Style)

포르투갈의 전성기인 1490년부터 1540년까지 약 50년 동안 포르투갈에서 유행한 화려한 건축 양식을 말한다. 비틀림 기둥이나 팔각기둥, 바다를 나타내는 밧줄, 파도, 부표, 물고기, 조개 문양 장식 등이 특징이다. 고딕 건축에 바탕을 두고 이슬람 건축 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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